이종희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 이종희 교수

여름방학을 맞이해 건강 챙기기 프로젝트를 호기롭게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수영 배우기였다. 늘 바쁘게 사는 남편에게도 ‘당신 건강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라는 협박과 ‘함께 취미 생활을 하면 없던(?) 부부 정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느냐’라는 애원을 뒤섞어 어렵게 함께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제주도에서 의외로 부부가 함께 강습을 받을 만한 수영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곳은 너무 멀고 어떤 곳은 남자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타협한 곳이 집에서 15분 거리인 체육관의 무료 수강이었고 무료인 만큼 온라인 신청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부부가 같은 시간대에 초급반 신청에 성공했고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수영복과 수경, 수모 등을 새것으로 사두고 강습 시작하는 날을 설레는 맘으로 기다렸다. 꼭 초보일수록 장비 준비에 정성을 가하며 티를 내기 마련이다.

드디어 수영 첫날! 물속을 들락날락하며 숨쉬기를 배우고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발차는 연습도 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할 만했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부부는 서로를 격려하기도 하고, 젖은 머리를 저녁 바람에 말리며 상큼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진도는 급격히 빨라졌고 팔 돌리기 연습을 하면서부터 그야말로 ‘멘붕’이 시작됐다. 팔은 곧게 천천히 돌려야 했고, 다리는 쉴 새 없이 저어야 했으며, 고개는 왼팔에 바짝 붙여 숨을 크게 쉬란다. 타고나기를 운동 신경 제로 상태에서 태어난지라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데 강사는 계속 바른 동작을 요구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어느 정도 앞으로 나가다가도 ‘내가 지금 팔을 제대로 돌리고 있나?’ ‘무릎을 구부리지는 않았나?’라는 이론적 생각이 나의 뇌에 스치면, 바로 몸의 균형은 깨지고 허우적거리며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문득 자전거를 배울 때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배울 때, 아버지가 뒤에서 꽉 잡아주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페달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자전거가 가볍게 느껴져 뒤돌아보니 아버지는 저 멀리서 활짝 웃으시며 손을 흔들고 계신 게 아닌가? 그때 느낀 환희와 경이로움이라니…. 만약 그때 아버지께서 ‘오른발을 세게 돌릴 때 왼발은 힘을 빼야 하고, 몸은 곧게 펴야 중심을 잡을 수 있고…’ 등의 이론적 설명을 하셨더라면 나 같은 몸치가 과연 자전거를 배울 수 있었을까? 머리로 익힌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것이다. 수영 또한 몸이 그 감각을 익혔을 때 물 속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 삶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행복, 기쁨, 사랑, 평화’ 등의 감정을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우리는 늘 번뇌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다고 너그러운 상생의 사랑을 향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서를 통독한 크리스천이라고 온전히 평화 속에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매에 걸려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노인도 몸으로 익힌 피아노나 칼질 등은 능숙하게 한다고 한다. 머리로 아는 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 그 감각과 감정을 몸으로 익히고 기억해야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몸으로 익히는 것은 쉽지 않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 마음, 사랑을 독점하려는 편협한 마음,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 등이 우리 유전자 속에 깊이 박혀 몸의 체질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여정이며 실패를 반복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수영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냐고? 묻지 마라. 짜고 쓴 인생 맛을 톡톡히 보았으니!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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