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본지 논설위원 / 명지대 교수, 미래정치연구소장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대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영국의 고등교육평가기관인 THE(Times Higher Education)가 얼마 전 발표한 세계대학순위에 따르면 상위 200위 내에 포함된 우리나라 대학은 5개에 불과하다. 평가지표의 신뢰성과 서열화의 객관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기관의 평가이기에 우리 고등교육의 아픈 현실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대학은 위기에 처해있다. 양적 팽창의 산업화 시대에는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대학의 기능이 충분했으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대학이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한 새롭고 다양한 교육·연구의 패러다임을 제공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대학들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길을 잃고 있는데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구조적인 차원에서 보면, 대학은 물론 우리 사회가 한국 고등교육의 비전과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여유와 역량이 없다. 교육부 수장은 자주 교체되고 대학은 평가에 급급하다.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정부의 개입과 통제로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이 실종돼 대학이 교육·연구의 내실화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졌다. 최근 대학들이 정부 주도의 대학 구조개혁 평가에 대비해 많은 재정적·행정적 투자를 했지만 과연 이러한 노력이 교육의 질 향상으로 귀결될지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들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자생력을 갖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가장 시급한 구조적인 조건은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1주기 대학 구조개혁 평가와 2주기 대학 기본역량 진단평가는 학령인구의 급감에 대비해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학의 정원감축과 구조개혁을 주도한 것인데, 양적 평가에 내몰린 대학들의 소모적인 경쟁을 유발해 오히려 고등교육의 질적 성장을 퇴보시킨,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이 됐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신입생을 제대로 충원하지 못하는 대학들이 시장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개입해 생존 대학의 비율과 입학정원까지 인위적으로 정하는 것은 최악의 관료적 권위주의 발상이다. 평가와 재정지원이 연계돼 평가준비에 교수들이 대거 투입됐고 교육과 연구는 부차적인 업무가 됐으며 대학의 서열화와 줄 세우기는 더욱 악화됐다.

정부의 간섭이 최소화돼야 대학 위기 극복을 위한 두 번째 조건인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 수년간 지속된, 사실상의 등록금 동결로 재정이 악화된 대학들은 정부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해 연구사업 및 산학연계사업을 진행하는데, 대학과 연구자들은 정부의 정책기조를 반영하는 가이드라인을 직간접적으로 전달받아 자율성을 발휘할 공간이 위축된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재정적·행정적으로 정부에 종속돼 교육 수요자인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과 서비스에는 소홀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의 미래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조건은 교수들이 연구에 매진해 사회적 책임감을 다하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대학이 연구중심 대학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상아탑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새로운 지식과 가치의 창출을 통한 사회적 기여라고 볼 때, 연구 활동은 교수의 책무다. 교육만 매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 지식의 전달은 시대적 흐름에 뒤처진 낡은 교육이 될 수 있다. 교수들이 연구실과 실험실 지키기의 중요성을 자각할 때 대학의 위기는 극복 가능하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의 급감으로 한국 대학의 생존 환경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고등교육의 비전과 가치를 정립하고 연구와 교육의 자율성 확보를 위한 노력에 정진한다면 현재의 위기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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