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0주년 / 중화인민공화국방문 회고기 上] 27명의 대학학보 주간교수 우여곡절끝에 '죽의 장막' 첫 발
[창간30주년 / 중화인민공화국방문 회고기 上] 27명의 대학학보 주간교수 우여곡절끝에 '죽의 장막' 첫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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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ㆍ 전 한국대학신문 논설위원

한국대학신문이 1988년 창간된 직후 당시 홍남석 대표는 전국 대학신문사 주간 교수들의 학술과 문화교류를 위한 중국(당시 중공)방문을 추진했다. 1980년대는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이어 노태우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대 상황이었다. 더구나 대학은 학생들의 저항과 민주화 운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구금 당하는 등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념적으로도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던 시대였다. 이에 공산국가의 현실을 학생 기자들에게 정확히 전달, 지도하고 아울러 베이징대학 등 대학 상황을 둘러보자는 목적으로 주간 교수들의 중국방문을 제안했다. ‘철의 장막’이라 불리는 소련과 ‘죽의 장막’인 중공은 적성국가로, 감히 방문은 생각도 못 하던 그 시절에 홍남석 대표는 문교부와 안기부를 찾아다니며 중국방문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대학 초청 형식으로 방문이 성사돼 1989년 2월 12부터 21일까지 9박 10일간의 여행이 허락됐다. 본지 창간 30주년을 맞아 당시 충대신문 주간이었던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가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방문회고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기행문은 송백헌 명예교수가 당시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바탕으로소장하고 있는 사진 자료와 본인의 기억을 더듬어 작성했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베이징 서도우 공항앞에서 단체 사진
베이징 서도우 공항앞에서 단체 사진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

‘철의 장막’이라 불리는 소련과 ‘죽의 장막’인 중공은 적성국가로, 중국방문은 감히 생각도 못하던 그 시절에 홍남석 대표는 문교부와 안기부를 찾아다니며 중국 방문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몇몇 주간교수들과 상의를 했다. 이 일이 성사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한 1988년 2월 1일부터 3일까지 경북 백암온천에서 전국신문사주간교수회의가 열리는 동안 홍 대표는 중국방문 계획을 발표하면서 희망교수들의 참여를 권유했다. 왕복 비행기 값과 숙식비는 참가교수들이 부담하고 기타 경비는 한국대학신문이 부담한다는 조건이었다.

설명을 들은 교수들은 호기심과 더불어 과연 이 일이 성사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이후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면서 방문단은 고려대 서영호, 연세대 류인희, 한양대 이건청, 성균관대 김옥배, 건국대 최한수, 서울시립대 한형수, 동국대 임영정, 수원대 목정균, 경기대 김규하, 아주대 조영호, 성심여대 문병옥, 인제대 조용현, 과기대 오현봉, 동의대 김창근, 해양대 황을문, 경성대 정원용, 경북대 권기호, 부산대 하일민, 전남대 김현곤, 강원대 강동엽, 충남대 송백헌, 충북대 안인찬, 포항공대 김원중, 안동대 남치호, 대전공전 심정보 교수, 그리고 홍남석 대표와 직원 등 총 29명으로 확정됐다. 나 역시 이창갑 충남대 총장의 배려로 공무출장을 달아 참여하게 됐다.

마침내 최응구 베이징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소장의 초청 형식으로 중국 방문계획이 성사돼 1989년 2월 2일 참가자들은 코엑스 무역센터 51층 로비 무역클럽에서 상견례를 한 다음 발대식을 갖고 인솔 단장으로 부산대 신문사 주간 하일민(철학) 교수를 선출했다. 이어 45층 회의실에서 안기부가 주관하는 소양교육을 장시간에 걸쳐 받고 마지막 절차로 문교부를 거쳐 외무부에서 여권 대신 종이 한 장에 연명으로 적힌 2월 12부터 2월 21일까지 9박 10일의 여행허가증을 받았다.

당시는 중국을 직항하는 항공편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항공편으로 홍콩으로 가서 1박하고 다음날 ‘중국민항’편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후 시안, 광저우, 구이린을 차례로 여행한 다음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1박을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2월 12일 아침 7시에 김포공항 1청사에 모여 탑승수속을 하려면 여행 전날 서울에서 자야 하기 때문에 11일 오후에 상경해 김포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나이아가라호텔’에서 1박을 했다. 긴 여행 일정이라 호텔에서 푹 자야 했지만, 적성국가 중공을 방문한다는 기대감과 불안감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1989년 2월 12일 일요일 맑음

9시 정각에 김포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은 3시간의 비행 끝에 홍콩 카이탁 공항에 도착했다. 홍콩은 외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서 출국장에서부터 만원이었다. 일행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지 안내원을 따라 가까운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한국식당으로 이동했다. 차중에서 가이드는 홍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좁은 땅 위에 하늘 높이 솟아있는 빌딩 숲이 장관을 이뤘는데 낮에 보는 홍콩의 시가지는 건물들이 낡고 오래된 것들이 많아 다소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는 홍콩은 밤에 봐야지, 낮에 보면 다소 실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점심을 마치고, 일행은 배를 타고 바로 건너편 홍콩섬으로 건너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홍콩의 부자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리플스베이라는 동네에 도착했다.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저마다 멋을 내고 있는 앞으로 너른 해변이 펼쳐져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1977년 영화배우 신상옥과 최은희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납북돼 이 해변이 더욱 유명해졌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행은 한적한 해변에서 오랜 시간을 거닐면서 오후의 한때를 보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일행은 이 해변과 이웃해있는 에버딘 항구 앞 잔잔한 바다 위에 정박해 떠있는 점보(JUMBO)식당으로 배를 타고 이동했다.

일행의 만찬요리는 중국음식이었는데 종류도 많고 양 또한 어찌나 많은지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먹었다. 저녁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와서 식당을 바라보니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화려한 여객선처럼 불빛이 찬란했다.

차를 다시 탄 일행은 해발 554m의 빅토리아파크로 향했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돌고 돌아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구룡반도 쪽의 야경은 물론 홍콩섬 쪽의 야경 또한 환상적이었다. 내 평생 이런 야경은 처음이라 그저 묵묵히 입을 굳게 다물고 휘황찬란한 야경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 배를 타고 구룡반도에 도착해 숙소에서 비로소 여장을 풀었다.

1989년 2월 13일 월요일 맑음

아침을 마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10시께 카이탁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을 위해 공항 심사대에 선 우리는 불안한 마음이 앞서 다소 긴장이 됐다. 그런 생각은 ‘중국민항’을 탑승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11시가 넘어서 이륙한 비행기에 나는 요행히 창가에 배정돼 창밖을 바라보고 여러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비행기는 숲이 많은 험한 산악지대를 지나 엄청나게 길고 넓은 양자강이 흐르는 평야지대를 날고 있었다. 들판의 군데군데에는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정겨웠다. 그것이 바로 중공의 농촌이라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보이는 지상에는 바둑판처럼 큰 구획의 농토와 수로가 어우러진 대규모농장이 있었다. 이는 요순시절에도 나라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 마오쩌둥이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농지개량과 집단 영농에 집중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했다.

3시간 40여 분의 비행 끝에 일행은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정문 앞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일행은 곧바로 베이징 01-50816호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안에서 우리의 중국 여행을 현지에서 돌봐줄 국제여행사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유창한 우리말로 다음과 같이 인사 겸 안내원을 소개했다.

“여러분들께서 베이징에 오신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내린 비행장은 서우두국제공항으로 중국에서 제일 큰 비행장입니다. 이 비행장은 1981년에 새로 확장했는데 비행장 길이가 3000m나 됩니다. 모두 50여 개의 비행기 코스가 있으며 세계 20개 이상의 나라 공항과 통하고 국내에 30여 개 항로가 설치돼 있습니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대신했기 때문에 베이징 시내로 직행했다. 한겨울이라 낙엽은 떨어졌지만,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 양옆에 서있는 가로수들이 각각 두 줄로 서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는 선도 그어지지 않은 채 낡은 트럭과 조잡하게 보이는 승용차, 자전거가 뒤범벅이 돼 무질서하게 달리고 있었다. 낡은 트럭의 뒤편 화물칸에는 여러 명의 노동자로 보이는 남녀가 타고 있어 마치 우리나라 1950년대의 도로 풍경을 보는 듯했다.

그런 길을 한참 달려 드디어 우리는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도착해 장안대로변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 기념탑 앞에서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 기념탑 앞에서

보기에 엄청 큰 광장이었다. 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져 1651년에 개축했다는 이 텐안먼 광장은 남북으로 880m, 동서로 500m, 넓이 44만㎡에 100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고 하는데 국가 행사나 역사상 큰 행사의 무대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이 광대한 광장은 관광을 즐기는 사람, 각종 운동과 산책을 즐기는 사람, 제복을 입고 광장을 경비하는 경비원, 연날리기와 각종 놀이를 하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모자나 신발들이 홍콩 사람들의 복장과 비교할 때 낡고 칙칙해 볼품없어 보였다.

일행은 광장 중앙에 자리한 마오쩌둥주석기념관 앞으로 이동했다. 그 기념관 옆에는 인민영웅기념관이 있고, 여기서 바라보니 동으로는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인민대회당이 있다. 북으로는 장안대로를 사이에 두고 붉은 벽에 마오쩌둥의 사진과 함께 구호가 걸려있으며 반대쪽에 텐안먼이 자리하고 있다.

4시까지 자유 관람이 주어져 일행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광장 이곳저곳을 관람했다. 나는 문득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으니 관광객 하나가 광장 구석 쪽을 가리킨다. 그곳을 가니 허술하게 지은 화장실 건물이 있는데 문짝은 하나도 없고 안이 보이는 그대로 남녀가 용변을 본다. 그들은 이곳을 측간(厠間)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남자 화장실의 입구에는 남측(男厠), 여자화장실 입구에는 여측(女厠)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그 측간 앞에는 소변이 그대로 흘러내려 도랑을 이루고 있었고 악취가 진동했다. 내가 그곳으로 다가가자 화들짝 놀란 여자 하나가 용변을 보다 말고 얼른 치마로 앞을 가린다. 나는 그곳에서 겨우 용변은 마쳤으나 그 찝찝한 여운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모인 일행은 저녁 식사 전에 서점에 들렀다. 베이징에서 비교적 큰 서점이라고 하는데, 대형 서점답게 각종 서적들이 분류돼 서가에 질서 있게 꽂혀있었다. 그런데 그 진열된 책들은 일반적으로 북 디자인이 되지 않아 우중충했고 우리나라처럼 진열된 것이 아니라 도서관 서고의 서가처럼 배열된 곳에다 진열한 것이 특징이었다. 나는 책을 살 필요를 느끼지 않아 서점은 대충 관람하고 바로 옆에 자리한 대형문방구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도 각종 문구들이 많이 진열돼 있었지만, 품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였는데, 그중에서 ‘영웅(英雄)’표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에 원고는 주로 만년필로 썼는데, 한자어나 우리 글자를 쓰기에 미제 ‘파카’ 만년필은 미끄러워 나는 주로 대전 외래품 시장에서 ‘영웅’ 만년필을 1만원씩 주고 사서 썼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 영웅만년필이 금장과 은장 두 종류가 각각 많이 쌓여있는데 금장은 1000원 은장은 500원이라고 한다. 이곳에 와서 영웅만년필에 금장과 은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은장을 1만원씩 사서 쓴 나에게 겨우 500원밖에 안 되는 값을 보고 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종류를 각가 5자루씩 샀는데 옆에서 이를 본 모 교수가 ‘뭐야! 뭐야!’ 하면서 남은 몇 개 안되는 만년필을 싹쓸이해 모두 웃고 말았다.

서점과 문방구점 관람을 마친 일행은 식당에 들어가 만찬을 들었다. 깨끗하고 넓은 홀에는 둥근 회전 식탁이 10여 개 놓여있는데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들이 음식을 날라 손님의 그릇에 나눠 담아주고는 식당 한쪽에 줄을 서서 대기하곤 했다. 중국 땅에 와서 처음으로 푸짐하고 맛있는 많은 종류의 요리와 술을 젊은 여인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먹고 마시니 갑자기 중국의 귀족이 된 듯 흐뭇해졌다.

만찬이 끝난 뒤 일행은 베이징에서 최상급인 샹그리라호텔(香格里拉大飯店)에서 여장을 풀었다. 앞으로 며칠을 묵을 이 호텔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호텔이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1989년 2월 14일 화요일 흐리고 비 다음 흐림

호텔에서 아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베이징대학 부설 조선문화연구소 이선한 교수가 나를 찾아왔다고 프런트에서 전화가 왔다. 로비에 내려가니 그는 반갑게 맞으며 내일 일행의 베이징대학 방문에 앞서 나를 먼저 찾은 것이라 한다. 그와는 이미 지면을 통해 알고 있는 처지였는데 내가 이번에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최응구 소장으로부터 듣고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을 물어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훌륭한 호텔은 처음 들어왔다고 하면서 “내일 있을 베이징대학 방문은 북한과 일본 등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저희 조선문화연구소 소장 최응구 교수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내일 여러분께서 저희 대학을 방문하면 제가 안내해 총장실에서 간담회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일정을 알려줬다.

나는 그를 홍 대표 방으로 안내해 내일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상의한 다음 로비로 나와 잠시 환담을 했다.

그는 로비에서 자신은 지난날 북한에서 유학해 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며 자신이 지은 《조선문학사》를 나에게 선사했다. 나는 답례로 청바지 한 벌과 와이셔츠 하나를 줬는데 사뭇 감사한 인사로 “내 평생 이렇게 훌륭한 바지와 적삼을 처음 입어봅니다” 하고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호텔 로비에 모인 일행들에게 가이드는 ‘오늘의 일정은 명 13릉과 팔달령에 있는 만리장성을 관광하는 코스’라고 했다.

9시에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베이징에서 40㎞ 거리에 있는 명 13릉을 향해 달렸다. 마침 이일호 가이드가 나의 옆에 앉아 그와 몇 마디 대화를 시작했다. ‘저는 조선족으로 진성이 본관으로 아버지 고향은 경북 안동입니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하고 뒤에 베이징에 와서 살게 돼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을 하고 다시 여업(餘業)으로 이렇게 일을 하게 돼 행복합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시가지는 한참 개발 붐이 불어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는데 아직도 많은 가옥들은 길게 지어진 초라한 기와집들이었다. 그 긴 건물에는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방 하나 혹은 둘로 이루어진 가구마다 3대가 한 집에 함께 사는 실정이어서 젊은 아들 부부가 집안에 쉬고 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들을 데리고 공원이나 길가에 나와 거닐 수밖에 없어 저렇게 많은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밖에서 서성인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마침내 버스가 명 13릉 입구에 이르러 차에서 내렸다.

명13릉이 가까워지자 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명13릉은 중국 북경시 창편구(昌平區)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나라 임금과 황후의 능묘군입니다. 영락제(永樂帝)가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이후의 황제 13대의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습니다. 이 중 만력제(萬曆帝) 즉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묻힌 정릉(定陵)은 내부 지하 궁전도 공개되고 있습니다. 홍무제(洪武帝)는 남경에 있는 효릉(孝陵)에 묻혔고, 2대 건문제(建文帝)는 정난의 변으로 생사가 불가능한 채로 실종됐고 7대 경태제(景泰帝)는 탈문의 변으로 퇴위해 사후 북경 서쪽 교외 금산에 묻혔지만 명13릉에는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버스는 명13릉 입구에 이르러 차에서 내렸다.

대흥문에서 장릉까지 이어지는 공간의 석물들
대흥문에서 장릉까지 이어지는 공간의 석물들

먼저 일행은 정문인 대흥문에서 장릉(長陵)까지 이어지는 공간에 석물들이 줄지어 선 넓은 길을 지나 정문으로 향했다. 능으로 가는 양쪽에는 갑옷을 입은 무관과 의관속대를 한 문관 등 12명의 문무 공신을 조각한 석상과 사자, 해태, 낙타, 코끼리, 기린, 말의 형태를 한 24개의 돌짐승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서야 정문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 구석에 가판대를 설치한 상인들과 각종털목도리를 파는 장사들이 달려와 경쟁적으로 사기를 권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우 목도리 하나에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데 이곳에서는 겨우 5000원이란다. 그런데 그 목도리를 만져 보니 우리가 어릴 적에 사용했던 귀싸개처럼 가죽에 기름을 빼지 않고 그냥 말려서 뻣뻣했던 그런 목도리였다. 모두들 싸다는 소리에 잠시 귀가 솔깃하여 만져보고는 되돌아서고 말았다.

명13릉이라고 하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장릉(長陵)과 정릉(定陵) 두 곳 뿐인데 그 가운데 오늘은 정릉만 보게 돼 내심 반가웠다. 왜냐하면 정릉의 주인공 신종황제(神宗皇帝)는 바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내준 고마운 임금이므로 그 능에 찾아가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도 하나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 그에 대한 많은 비난의 소리가 있음에도 오히려 그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이드는 정릉관람에 앞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다.

“이 정릉의 주인공 신종황제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무덤인 이 정릉을 조성하기에 몰두하여 6년간 2년치 국가 총예산 에 해당하는 거금을 쏟아 부으며 초호화 지하궁전을 건설하였습니다.

장릉(長陵) 발굴에 앞선 예비조사로 정릉(定陵)이 1956부터 1959년까지 발굴되었는데 땅속 깊은 그곳에는 정전(正殿), 중전(中殿), 좌우배전(左右配殿)이 있고, 후전(後殿)에는 황제와 황후의 관이 놓여 있습니다. 출토된 호화로운 금은으로 만든 그릇들의 부장품은 앞뜰의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고, 지하묘실은 정릉박물관으로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일행은 지하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데도 관람 인파가 무척 많았다. 나는 왕의 무덤 앞에서 잠시 묵례를 했다.

지하궁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니 그 사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진열관에 들어가 발굴된 유물을 관람하고는 능원 내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 새 비는 그쳤으나 여전히 흐린 날씨였다.

다시 버스에 탄 일행은 팔달령(八達嶺)에 자리한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주차장에 멈추었다. 일행이 모두 내리자 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분들께서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만리장성은 중국 최대의 군사방어용 건축물로 길이가 무려 6.000km나 됩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그 중 일부인 팔달령 만리장성을 보시게 됩니다.

팔달령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의 ‘사통팔달(四通八達)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이곳 팔달령 만리장성은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중 가장 빨리 관광지로 일반에 공개된 장소입니다. 현재 건축의 잔존물은 명대에 건설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의 만리장성은 수도 방위와 왕조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축조되었으므로 팔달령의 만리상성에서 특히 견고한 건축물이 됐다. 일반적인 벽돌로 건축돼 곳곳에 망루가 있는 만리장성은 북경 근교의 장성 특유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다음 우리는 줄을 서서 계단을 따라 성곽으로 올랐다. 성곽은 능선을 따라 저 높은 산꼭대기까지 끝없이 뻗어 있고 중간 중간에 높은 망루가 서 있어 모든 산이 만리장성의 성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엄청난 구조물 앞에서 나는 잠시 인간의 힘이 위대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 앞에 선 내가 갑자기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말로만 들어왔던 만리장성을 처음으로 밟아본다는 희열감에 감격하기까지 했다. 전(塼)이 깔린 성곽의 바닥은 무척 넓어 자동차가 다닐 정도였는데, 휴일이 아닌데도 관광인파로 가득 찼다.

팔달령의 만리장성에서
팔달령의 만리장성에서

당시는 중국이 개방되지 않아 주로 이곳을 찾은 이들은 휴가차 나온 군인들과 직장에서 표창을 받고 공로휴가차 가족단위로 온 그룹, 북경에서 온 노인층 등 중국인들이 주를 이루었고, 간혹 북한의 고위층이 출장을 왔다가 들렸다는 사람도 만났다. 그런데 이곳을 찾은 인파의 복장은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쓴 사람들이 많아서 군인인지 경찰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됐다. 그 밖의 관광객들은 우중충한 잠바차림이어서 대체적으로 생활수준이 낮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장성의 제1망루까지 걸었으나 숨이 찰 정도로 힘이 들었는데, 일행 중에 잘 걷는 이는 제2망루까지 갔다 왔다고 자랑을 한다.

이처럼 평탄한 길을 걷는데도 힘이 드는데, 그 옛날 이것을 쌓은 민초들의 고통을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벽돌 하나 나르며 쌓았을 민초들의 고통이 성에 배어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은 이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런 점에서 볼 때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라’는 이야기에 수긍이 갔다.

장성 관람을 마치고 일행은 북경 시내로 돌아오니 오후 4시가 됐다. 나는 만찬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유리창(琉璃倉) 구경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모두들 유리창이 무어냐고 묻기에 나는

유리창 거리는 유리로 만든 창이 있는 거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인사동거리처럼 북경의 고문화거리라고 말한다. 이 거리는 과거 조선의 사신들,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이 틈나는 대로 이 거리를 거닐며 학문을 불태웠던 곳이기에 우리들은 꼭 들려야 한다.

이 거리는 명나라가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면서 궁을 만들 때 채색 유리기와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해서 유리창이라 부르게 됐다. 그 뒤 청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도서와 문방사우(文房四友)의 집산지로 변모했고, 여기에 신간서적보다는 고서적이나 고문서, 글씨와 그림을 파는 가게가 점차 늘면서 그림이나 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 낙관을 찍기 위한 화려한 돌과 인주를 팔면서 선비들의 필수 순례코스가 되었다.

유리창 거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거리 양편에는 듣던 대로 고서적과 골동품들을 파는 가게들과 문방사우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품위 있는 분위기였다. 일행과 함께 거리를 한 바퀴 돈 다음 나는 장암(長巖) 이곤순(李坤淳)과 송암(松巖) 정태희(鄭台喜) 두 서예가에게 선물할 필기구를 사기 위해 필방을 찾아갔다. 그 방면에 상식이 부족한 나이지만, 두 서예가들이 평소 서울 인사동에서 사서 쓴다는 서주호필 ‘대봉(大峰)’ 붓과 ‘철재옹(鐵齋翁)’ 먹, 그리고 ‘상해인니(上海印泥=印朱)’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는지라 그것들이 있느냐고 가이드를 통해서 물으니 선뜻 내놓는데 값이 내가 듣고 있는 것보다 엄청 헐해서 나는 각각 10벌씩 구입했다. 벼루는 단계석 벼루가 최고라고 들었지만, 값이 비싼데다 너무 무겁고, 질 좋은 종이가 많았으나 부피가 너무 클 것 같아 세 종류만 구입하였다.

유리창 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들기 위해 자옥반점(紫玉飯店)으로 이동했다. 어제 저녁처럼 만찬장은 풍성했다. 그런데 북경에서는 많은 음식점 한 구석에는 서화를 걸어놓고 그 앞에는 필기수를 진열해는 팔고 있었는데, 그림이나 붓과 먹 등이 저질품이 아닌 것 같았다.

만찬을 마치고 27극장으로 이동해 서커스를 관람했다. 어린 시절 동춘서커스단을 구경했던 나의 안목으로 보기에도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의 묘기의 연속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들은 이야기지만, 이곳 교예단의 묘기는 세계 정상급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서커스나 카드섹션 등의 묘기는 전제주의 국가가 그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극장에서 나은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북경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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