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0주년 /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회고기 下] 대륙의 위대한 전통과 무한한 잠재능력 체험 기회
[창간30주년 /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회고기 下] 대륙의 위대한 전통과 무한한 잠재능력 체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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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ㆍ 전 한국대학신문 논설위원

한국대학신문이 1988년 창간된 직후 당시 홍남석 대표는 전국 대학신문사 주간 교수들의 학술과 문화교류를 위한 중국(당시 중공)방문을 추진했다. 1980년대는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이어 노태우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대 상황이었다. 더구나 대학은 학생들의 저항과 민주화 운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구금 당하는 등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념적으로도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던 시대였다. 이에 공산국가의 현실을 학생 기자들에게 정확히 전달, 지도하고 아울러 베이징대학 등 대학 상황을 둘러보자는 목적으로 주간 교수들의 중국방문을 제안했다. ‘철의 장막’이라 불리는 소련과 ‘죽의 장막’인 중공은 적성국가로, 감히 방문은 생각도 못 하던 그 시절에 홍남석 대표는 문교부와 안기부를 찾아다니며 중국방문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대학 초청 형식으로 방문이 성사돼 1989년 2월 12부터 21일까지 9박 10일간의 여행이 허락됐다. 본지 창간 30주년을 맞아 당시 충대신문 주간이었던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가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방문회고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기행문은 송백헌 명예교수가 당시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바탕으로소장하고 있는 사진 자료와 본인의 기억을 더듬어 작성했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1989년 2월 16일 목요일 흐리고 비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

호텔을 떠난 일행은 익히 들어왔던 자금성(紫金城)의 남문 오문(午門) 앞에 도착했다. 가이드 이일호씨는 일행을 모아놓고 간단한 설명을 했다.

“지금 여러분께서 관람하시게 될 자금성은 고궁(故宮)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황궁으로 명나라 영락제 때 세워진 베이징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天子)의 궁전은 하늘나라 임금인 천재(天宰)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과 같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자금성은 1406년부터 1420년까지 매일 100만 명씩 인력이 동원 돼 15년 동안 지어진 것인데, 그 넓이는 72만㎡나 됩니다. 방어의 목적으로 궁전 밖에는 10m 높이의 높은 담과 사방에다 성루를 짓고, 그 성 밖에는 자객의 접근을 막기 위해 넓이 52m나 되는 해자(垓字)를 설치했습니다. 이곳 자금성에서는 570여 년간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살았으므로 100만 점 이상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거나 소장돼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일행은 오문에서 북쪽 끝에 있는 신무문(神武門)까지 일직선으로 지어진 궁궐을 차례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오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가자 태화문(太和門)이 나오고 그곳을 통과하면, 엄청 넓은 궁궐의 마당이 나오며 마당 저편에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 태화전(太和殿)이 보였다.

태화전은 자금성의 정전(正殿)으로 황제의 즉위식이나 각종 공식행사와 경축의식을 거행하는 곳으로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관광 안내 책자가 준비돼있지 않은 시절이라 일행은 가이드를 바짝 따라다니며 설명을 놓치지 않고 들어야 했다. 다행히 오늘 이선한 교수가 우리의 자금성 관광에 동참해 수시로 보충 설명을 해줘 이해가 빨랐다.

3단으로 이뤄진 토대 위에 높이 세워진 이 태화전은 그 높이가 27m, 넓이가 2.370㎡라고 하는데 지붕은 모두 황금색 기와로 돼있다. 이곳에는 지구와 우주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있었고 그 건물의 기단에는 용과 봉황을 섞어서 조각한 배수구가 보였다. 그런데 엄청 큰 화로나 향로처럼 생긴 쇠항아리가 건물 좌우 구석 계단 위에 서있어 가이드에게 물었다. 이것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동과 철로 만든 항아리로 궁궐 안에 모두 300개나 있고 태화전과 건청전에는 금으로 도금한 수통이 30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1900년 께 연합군이 침입해 이것을 들고 가지 못하고 금만 벗겨가 지금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행은 옥좌가 있는 태화전의 내부를 관람하고 나와 좌우를 보니 처마가 서로 이어질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너무나 웅장하고 화려하며 정교하게 세워진 태화전을 보고 나는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자금성에서
자금성에서

일행은 다음으로 황제의 휴게실이었던 모양이 단아하게 생긴 중화전(中和殿)을 지나 지난날 과거 시험이 치러졌던 보화전(保和殿)으로 이동했다. 보화전에 오르는 양편 계단의 중앙에는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엄청 큰 석조가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이 무늬가 새겨진 석조는 여러 조각으로 이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이뤄진 것인데 멀리 변방에서 운반해와 새겨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어 일행은 황후의 집무실로 사용됐던 교태전(交泰殿)을 관람했다. ‘무위(無爲)’라는 휘호가 걸려있는 교태전의 내부는 태화전의 내부보다 매우 아늑한 느낌을 줬다.

교태전의 뒤에는 황제의 침실로 사용했던 건청전(乾淸殿)이 있었는데 그 내부는 매우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건청전 뒤에는 황후의 침궁이었던 곤령궁(坤寧宮)이 있는데, 곤령이란 땅이 편안함을 바란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어 종교건물인 흠안전(欽安殿)과 청나라 건륭황제 때 3대 연극무대로 꼽히는 청음각(淸音閣)을 끝으로 자금성의 관람을 마치고 긴 담벼락을 지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나오니 거기에는 ‘고궁박물관’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이것으로 고궁박물관은 자금성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자금성은 참으로 위대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창조한 중국민족의 위대한 저력을 이곳에서 새삼 느꼈다. 근대 이후 국력이 쇠락해지고 공산체제로 비록 오늘의 민생은 궁핍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이 지닌 무한히 잠재한 힘은 우리가 앞으로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신무문을 나서자 북쪽으로 숲으로 덮인 그다지 높지 않게 솟은 산이 보였다. 그 산꼭대기에는 정자가 있는데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자금성의 또 다른 경승지 경산공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정보다 관람시간이 길어 경산공원의 관람은 그만두고 서둘러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동안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다.

국내선 탑승장으로 들어가니 대합실은 비행기를 기다리는 승객으로 만원을 이뤄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다리는 승객도 많았다. 일기 관계로 비행기가 연발돼 이렇게 만원이라고 한다. 1시 반발 시안행 비행기인데 시간이 돼도 개찰할 생각을 않는다. 3시가 넘어 겨우 개찰이 시작돼 승객이 모두 탑승하자 바로 이륙했다. 2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시안 상공에 도착했음이 방송돼 일행은 내릴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좀처럼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지 않고 공항 상공을 배회하는 듯하더니 ‘시안 비행장의 시야가 나빠 도저히 착륙할 수 없어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간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이드는 “중국에서는 아직까지 시측비행(視測飛行)을 하기 때문에 일기가 나빠 시계가 좋지 않으면 비행기가 착륙할 수 없어 출발한 공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2시간 걸려 시안까지 비행하던 것을 날이 어두워져 시계가 나빠 착륙할 수 없다고 불과 1시간여 만에 베이징공항에 되돌아왔다. 그런 관계로 모두 귀가 멍멍하고 아프다고 호소를 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온 일행은 내일 일찍 출발할 목적으로 공항 근처의 허름한 여관에서 1박을 했다.

1989년 2월 17일 금요일 비

여관을 출발한 일행은 근처의 한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탑승장에는 어제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데, 좀처럼 그 수가 줄지 않는다. 모든 비행기의 이륙이 지연되기 때문이란다.

탑승장은 인체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로 머리가 아픈데 공항을 순찰하는 경비원이 어깨에 총을 멘 채 한 손은 포켓에 넣고 담배를 피우는 한가로운 모습이 보였다.

12시가 가까워도 탑승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가이드는 일행에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돌격적으로 먹고 오자’고 했다. 처음에는 ‘돌격적’이란 전투어가 무슨 말인지 몰라 모두들 어리둥절했는데 그것은 ‘빨리 먹자’는 북한식 용어라고 설명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1시가 훨씬 넘어서야 겨우 비행기는 이륙했다. 다행히 2시간의 비행 끝에 시안 근교에 자리한 비행장에 내릴 수 있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병마용 정문
병마용 정문

버스에 탄 일행은 시안의 장안성을 왼편에 끼고 얼마를 달리더니 다시 들판이 나오고 첨성대의 몇 십 배나 큰 여러 개의 화력발전소 구조물 옆을 달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차중에서 ‘오늘은 너무 늦어 먼저 진시황의 유적지인 병마용갱(兵馬俑坑)과 진시황릉, 그리고 화청지(華淸池)를 관람하고 시안으로 돌아와 1박을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시안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졌다는 병마용갱까지 두어 시간을 달리던 차가 드디어 목적지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앞에 도착해 모두 하차했다. 이어 일행은 축구장보다 큰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안내돼 들어가니 여러 줄로 된 홈 속에 흙으로 빚은 전사들의 모습이 실물처럼 도열해 있었다.

1974년 3월 29일 메마른 어느 봄날 우물을 찾는 농부의 곡괭이 끝에서 진시황과 함께 잠든 전사들을 흙으로 빚은 병마용갱을 발견했다. 8000명의 전사들, 670마리 말, 130대의 전차들이 함께 발굴됐는데 평균 키 180㎝, 진흙 160㎏의 실물 크기 전사들로 같은 표정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20세기 최대 발굴이 세상에 ‘빛’을 보기도 전에 유물도 때려부수던 ‘봉건 타파’ 문혁 광풍 속에 행여 ‘고대 유적’ 발굴이 화를 부르지 않을까 해 최초 발굴자들은 떨고 있었다고 소개 책자에 발굴경위가 간략히 적혀 있었다.

거대한 병마용갱은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2000년 전에 어떻게 이처럼 모두 다르고 정교하게 각각의 사람을 표현할 수 있었는지 경이로울 뿐이었다. 차를 타고 화청지로 오는 길에 왼편으로 동네 안산만큼 높은 산이 하나 보이는데 저 산이 바로 진시황릉이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비는 오고 날씨는 저물어 시간 관계로 차창으로 관람하고 여산 화청지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화청지 지역은 6000년 전부터 온천지로 이용됐고, 3000년 전 주나라 유왕이 이곳에 궁을 지으면서 휴양지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644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이곳에 탕청궁을 지었는데 그 뒤 당나라 현종이 이름을 화청궁으로 바꾸고 양귀비와 이곳에서 겨울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시안사건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다. 여산의 밑에 이 화청지에 들르니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퇴락했는데도 복원이 덜 돼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이곳들을 돌아보면서 영화란 결국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데 나약한 인간들은 그러한 진리를 망각한 채 권력과 명예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으로 돌아오니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일행은 어느 유물전시관과 붙어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들고 잠시 유물관을 구경하면서 유물 탁본 두어 장을 구입했다.

일행은 소안탑이 가깝다는 일본식 여관에서 시안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냈다.

1989년 2월 18일 토요일 흐림

시안 시내 구경을 못 하고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광저우(廣州)를 거쳐 구이린(桂林)으로 가는 날이라 서두른 것이었다.

비행기는 순조롭게 이륙해 11시에 광저우공항에 내렸다. 북쪽 지방은 한겨울이라 나무들이 모두 발가벗었는데 이곳은 거리에 녹음이 우거지고 집집마다 꽃이 만발했다. 홍콩이 인접해서 그런지 건물이 화려하고 거리를 거니는 젊은 남녀의 모습도 활기차 보였다. 시내 중심가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구이린행 비행기를 타고 구이린시와 지근거리에 있는 공항에 내리려 공항 광장에 나오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산이 예사롭지 않게 제멋대로 솟아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산의 모습이라 우리가 구이린에 온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구이린은 중국 남서부의 광시장족자치구(廣西莊族自治區)에 속한 도시로 남으로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는 곳에 있어 아열대 기후에 속해 따뜻한 곳이다. 구이린의 총면적은 2만7000㎢이고 인구는 350만 명 정도로 장족, 한족, 묘족, 모한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형성돼 있는데 그중 장족이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명, 청 때는 광어성으로 불리다가 1958년에 자치구로 승격됐다.

예로부터 계수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해서 계수나무 숲으로 불리는 구이린은 중국사람들조차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무려 3만8000여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있고, 리장을 끼고 있는 풍치가 빼어나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돼오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구이린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명성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일행은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시가지의 가로수가 모두 계수나무라고 하는데 처음 보는 계수나무라서 저 나무가 달 속에 있는 계수나무인가, 아니면 한약제로 쓰이는 계피의 원목인가 궁금증도 생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 계수나무는 달나라의 계수나무도 한약재의 계수나무도 아니었다. 이곳 구이린에는 우리 조선족이 한 명도 살지 않아서 이곳 사정을 자세히 물어볼 길이 없어 답답했다.

우리는 시내 중심지에 자리한 보석가공공장을 관람하고 걸어서 시내 관광에 나섰다. 아름다운 자연에 비해 도시는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길거리에 무질서하게 늘어선 잡상인들과 그 옆에서 장기를 두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님을 직감했다. ‘인민건설은행’이란 건물을 지나니 극장이 나왔다. 광고판에는 ‘과부촌’ 영화의 포스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선정적인 광고물들이 무질서하게 붙어있고, 조금 더 걷다보니 미장원과 이발소가 보이는데 1950년대 우리나라의 모습처럼 보였다. 일행은 서점에 들렀으나, 우리나라 서점처럼 다양한 책이 구비되지 않고 손님도 없어서 한가해 보였다.

저녁을 먹고 장족이 공연하는 민속공연을 구경한 다음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김옥배, 이건청 교수와
김옥배, 이건청 교수와

1989년 2월 19일 일요일 흐림

아침에 호텔을 출발한 일행은 시내에서 80여 ㎞ 떨어진 양숴(陽朔)라는 나루터로 갔다. 이곳이 장장 4시간여에 걸친 리장 투어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선착장에 이르니 많은 잡상인들이 골동품 같은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손님들을 유혹한다. 조금 더 내려가니 기묘하게 생긴 여러 종류의 배들에서 사공들이 역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양숴 투어는 양숴에서부터 구이린 시내까지 83㎞의 리장을 배를 타고 주변 경관을 즐기는 선상 여행이다. 일행은 유람선을 대절해 타고 투어를 시작했다. 산은 푸르고 강은 수려하고 동굴은 기묘하다 해 구이린 3절이라 부른다는 그 구이린 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비록 흐린 날씨이지만 배가 강 구비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전개돼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푸른 산과 강은 조화를 이뤄 멋을 더했다.

우리들이 타고 가는 배 옆에는 폐휴지와 건축 폐자재 같은 재활용품을 위험스럽게 잔뜩 싣고 가는 낡은 배, 생활필수품과 주민을 싣고 가는 초라한 배 등 여러 종류의 낡은 배들이 지나갔다. 강기슭에는 선상생활을 하는 듯한 주민들과 배가 보였는데 마치 도시 판잣집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 이런 배들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였다. 한편 강 언덕에는 하얀 양이 뛰놀아 목가적인 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다.

배가 한 구비를 도니 어부가 배 한 척을 세워놓고 두세 마리의 가마우지를 이용해 고기를 잡는 광경이 목도됐다. 조류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그 묘기가 하도 신기해 배를 멈추게 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가마우지의 목을 끈으로 조여놓아 고기를 잡더라도 목으로 못 넘기도록 해놓고 물고기를 잡게 하는 잔인한 수법이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소 한 마리 값에 해당한다고 하니 가마우지는 정말 비싼 존재임에 틀림없다. 12시가 넘자 선상 식당에서 구이린의 산수를 감상하며 음식을 먹는 운치도 오래 남을 추억거리였다. 끝없이 연속되는 기이한 산수는 조물주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으로 보였다. 4 시간 남짓한 긴 투어가 구이린의 선착장에서 멈췄다. 일행은 그곳에서 내려 엄청 큰 동굴로 안내됐다.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했던 이렇게 넓은 동굴 속에서 종유석이 연출하는 여러 형태의 모습을 관람하고 감탄했다. 이곳에는 이런 동굴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 동굴 안을 관람하고 나서 모노레일을 타는 정류소가 나와 그곳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달리다보니 어느덧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에 이르렀다. 풍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 동굴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시 시내에 있는 상비산(象鼻山) 관광에 올랐다.

계림의 산수
계림의 산수

코끼리가 강물을 마시는 모습을 했다고 해 이 산을 달리 코끼리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높이 200m에다 길이가 103m나 되는 이곳은 리장과 타오화장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코끼리가 목이 말라 이강에 코를 박고 물을 마시다가 굳어서 산이 됐다는 전설이 전하는 이곳에다 공원을 예쁘게 꾸며놓아 우리는 그곳을 거닐기도 했다. 상비산 관광을 마치고 나서 시내로 들어와 저녁을 먹고 야간 시내 관광에 나섰다. 그런데 우리가 밖에 나서자 키가 작달막하면서 예쁘게 생긴 장족 아가씨들이 우리를 마구 끈다. 이유는 술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말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낯선 나라 아가씨들과 허튼 수작을 하다가 한국 지성인이 국제적 망신을 당할까봐 모두들 그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고 시내 야경을 감상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1989년 2월 20일 월요일 맑음

이곳의 또 다른 관광지 천문산이 있다고 하는데 왕복에만 4시간이 걸린다고 해 관광을 포기하고 시내 관광을 했다.

산업기술이 낙후된 나라라 이곳에서 생산되는 모직물이나 보석들이 비교적 세련되지 않아서 선물로는 환영을 받을 것 같지 않아 눈요기로 만족해야만 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일행이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홍콩 카이탁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께였다. 홍콩의 주룽반도 지역 중심가를 관광하고 한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정식이라 일행이 앞다퉈 김치를 찾아 집주인은 며칠 동안 장사할 김치가 동나고 말았다고 투덜거린다. 어쨌거나 한정식으로 포식하고 저녁에는 홍콩의 야경을 다시 음미하고 호텔에 돌아와 중국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89년 2월 21일 화요일 맑음

오늘은 귀국하는 날이다. 긴 여정 끝에 집으로 돌아가자니 발걸음이 가볍다. 오랜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고생하거나 불상사 하나 없이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여행을 마침에 감사할 따름이다.

여행을 마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우리는 지난 10일 동안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높은 홍콩의 이곳저곳을 주마간산 격이나마 돌아보았고, 베이징의 빈곤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인민들의 실상을 보고 듣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통해 위대한 전통을 피부로 느꼈으며 생산공장에서 잠재능력을 엿보았다.

그것은 시안과 구이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비행 시설은 우리와 비교될 바가 아니지만,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자연과 문화유산을 통해 앞으로 웅비할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들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상국가 건설을 지향했던 공산주의의 획일화된 정책에 따라 지금은 다 같이 못사는 나라로 전락했지만, 그들의 풍부한 자연과 무한한 지하자원, 위대한 문화유산에다 10억을 훨씬 넘는 많은 인구는 그만큼 잠재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해 북방정책의 민간차원 교류를 한층 가시화시켰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면서 이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토대로 해 앞으로 학생지도나 학보사 운영에 좋은 참고자료로 삼아 보다 충실하고 건전한 사상교육뿐만 아니라 발전지향적인 국가관 확립해야 하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또 우리가 귀국하면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동남아지역이나 유럽지역 연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국가 방문도 권장해 학생들이 그 실상을 파악하도록 함은 물론 많은 문화유산 관람을 통해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도 교육의 한 방편이 되겠기에 당국에 적극 건의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일행은 공감했다.

그동안 우리 일행을 뒷바라지하느라고 고생한 홍남석 대표와 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끝)

중국 방문을 보도한 1989년 2월 15일 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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