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나와 한국대학신문] 윤동주 묘목을 심으며
[특별기고 / 나와 한국대학신문] 윤동주 묘목을 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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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종 전 한국대학신문 주필ㆍ 문학평론가
김우종 전 주필
김우종 전 주필

나는 덕성여대 퇴임을 앞두고 1994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대학신문 주필 직에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한국대학신문을 떠나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대학시절에 문학평론가로 등단하고 지금까지 내가 걷던 마음의 길을 바꿔보지 못하면서 47년간 외길을 걸어왔다. 그 길을 문학용어를 빌리면 참여문학이라고 한다. 그 세월 속에 서울 장충동의 한국대학신문 10년이 있고 그 후 13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해마다 대학신문의 창립기념작을 그리면서 그 모든 것에 내 신념을 담아오고 있다.

창립 30주년을 맞으면서 이 땅에서 한라보다 백두보다도 높은 듯 흘립하고 찬연히 빛나는 거봉 한국대학신문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비록 그것이 모래 한 알이었다 해도 이를 되새기게 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이 90에 이르러 이젠 화필도 문필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회가 깊다.

주필 직을 맡기면서 홍남석 사장은 내가 제자를 비서로 쓰게 하고 고급 승용차를 마련해주고 아직 끝나지 않은 대학의 강의나 방송활동 등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최선의 편의를 다해줬다. 기자들도 모두 좋았다. 다 함께 볼링장에도 가고 겨울에는 스키장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나도 스키를 탔었는데.

나는 대학신문 주필이 되면서 작은 묘목을 한 그루 심고 싶었다. 묘목은 어린 나무지만 나와 함께 자라면서 훗날 내가 떠나더라도 영원히 한국대학신문의 마당에서 자라며 이 나라 모든 대학인을 위한 알찬 열매를 해마다 맺어주고 그들의 그늘이 되어줄 천년 노거수가 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한국대학신문이 대학의 전문 언론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지도적 정신을 심는 것이며 이를 먼저 구체화한 것이 윤동주 기념사업이다. 한국대학신문은 전국 대학신문 주간 교수들의 중국방문과 학생기자들의 해외답사도 진행했지만 내가 후쿠오카와 교토의 윤동주행사를 추진한 것은 대학신문의 기본 정신 정립이라는 목적 수행을 위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이는 윤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에서의 추모위령제와 교토의 도시샤대학 시비건립 두 가지로 추진됐다. 물론 이것은 홍 사장의 적극적인 공감과 주도적 역할이 없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윤동주라는 이름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소중한 정신의 아이콘이다.

그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일제군국주의가 한반도와 온 세상에 죽음의 피구름을 몰고 올 때 ‘ 이에 맞서며 십자가를 지고 꽃처럼 사라진 인물이다. 그리고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한 그의 순결정신은 한국의 대학생이 지니고 가야 할 가장 고결한 정신의 응축이다. 그래서 이 묘목을 한국대학신문 마당에 심으려 한 것이다.

우리는 전국에서 선발된 미대생들로 하여금 후쿠오카 형무소의 행사장에 세울 초대형 그림을 제작하게 했다.

윤동주 기념사업단은 송백헌 이수복 교수등과 학생기자 그리고 가수 양희은 장사익 풍물놀이패 무용가 이애주 교수 대학신문 기자등 50명으로 조직돼 1995년 2월 13일에 후쿠오카로 갔다. 거기서 14일에 추모 위령제를 열고 다음에는 교토로 가서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세워질 윤동주 시비건립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오지마회관에서 본지 주최로 윤동주문학심포지엄을 열었다. 항공료와 숙박비등을 위한 모든 경비는 대학신문에서 부담했으며 홍 사장의 기념사는 내가 대독했다.

이 기념사업은 후쿠오카에서는 잘 진행됐지만 교토의 시비건립은 차질이 생겼다. 대학 측이 시비건립을 허락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스스로 세우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윤동주가 걸어다녔을 교토의 길가 민가 정원에 세우는 단계까지 성공시켰다가 이를 취소했다.

시비건립에 차질은 있었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학교당국이 스스로 해줬으니 우리는 힘을 덜었고 그후 또 교토의 우지가와에 세워지고 지금도 후쿠오카에서 건립운동이 추진되고 한국과 중국 도처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그것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일본의 후쿠오카와 교토와 도쿄 등만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에서 전개되는 많은 기념 행사도 후쿠오카의 그것이 최초의 발화점이 됐다는 것이 전연 틀린 말은 아니다. 1994년에 우리가 처음으로 높은 산정에 불붙인 윤동주 봉홧불은 그 후 날이 갈수록 더욱 크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이 사업은 한국대학신문의 내부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사랑과 평화를 위한 운동이다. 후쿠오카의 니시오카 겐지 교수도 과거에 일본군국주의가 저지른 과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기억장치의 의미라는 뜻으로 윤동주 시비를 꼭 세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대학신문의 이것은 실제로 아시아의 평화운동이다. 홍 사장은 대학신문의 이것이 그동안 대학신문이 했던 일 중 가장 잘한 것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역사가 기억해야 할 실제사항임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주필 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문학평론을 하고 교수직에 있으면서 그림도 그리니 전문성이 문제되지만 박정희 정권이 나로 하여금 한 때는 교수직도 빼앗고 글쓰기도 막았기 때문이다. 경희대 재직 중 체포되고 문인간첩단으로 고문·날조·투옥되고 해직교수가 돼 생계가 끊기고 에세이집과 평론집마저 판매·배포 금지되니 아마추어가 프로로 변신하며 한때는 그림으로 먹고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림으로도 내가 걷던 길을 바꾸지 않으려 애써왔다. 장미도 도라지도 많이 그렸지만 후쿠오카형무소 앞뜰의 춤추는 여인도 그렇고 30주년 기념작인 <나비들의 반란>도 그것이며 여기서도 한국대학신문을 통해 나는 처음 걷던 외길을 걷고 있으니 나는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대학신문 창간 30주년 기념화 ’‘나비들의 반란 3’ (김우종 전 한국대학신문 주필, 유화 30)

한반도가 화려하게 비상하는 모습을 숫자 3으로 형상화 했다. 아울러 한반도 위로 날아 오르는 나비들의 날갯짓은 처음 시작은 미약했지만 수많은 날갯짓으로 한국대학신문이 대학 발전과 한반도의 희망찬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의 기틀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염원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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