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 광주보건대학교 교수

김미 교수
김미 교수

KTX 서울행 열차를 탄다. 오래전에 시작한 교재 개정작업을 기어코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참여자가 많다보니 직접 얼굴을 맞대로 정리하는 이런 기회가 필요하긴 하다. 논의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해묵은 고민이 또다시 시작된다. 새로운 내용을 대폭 추가해서 신선한 교재를 만들고 싶은데 어느 부분을 손봐야 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막상 옛날 교재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중요한 것 같아 섣불리 뺄 수가 없다. 이러다간 새 교재가 백과사전처럼 두꺼워질 판이다. 아마 다른 교수님들도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작업이 늦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온갖 잡동사니를 언제 필요할지 몰라 꼭 껴안고 사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저장강박증이라는 일종의 장애로 설명을 한다. 물건 가치의 경중을 판단하지 못하니 버려야 한다는 결정을 못한다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들은 삶의 과정 그 순간에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내재적 두려움 때문이라고도 한다. 사실 그러한 장애는 어느 누구에게나 조금씩 내재하기 마련이다. 가끔 대청소를 할 때 쏟아져나오는 살림살이들과 자료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종이들을 보면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역설적으로 물건이건 마음이건 비워야 채워진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마음속의 비움이 커갈 때 하나님의 그 안에 더욱 크게 자리 잡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에서는 마음속에 가득찬 자만심, 애착, 소유욕을 버리고 무소유를 실천하라고 설파한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날마다 비우는 것이 진정한 도를 닦는 방법이라는 구절이 있다. 굳이 거창하게 종교나 옛 성인의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예는 현실생활에서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몇 년간 전혀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싹 치워내고 그 자리에 아기자기한 소품들만 전시해도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다. 나 역시 최근 집을 옮기면서 이런 것들을 실감했다. 서재로 쓰던 공간에서 끝도 없이 나오던 오래된 책들을 모조리 들어내고 아주 조그마한 영화감상공간을 만들었다. 애들이 학교다닐 때는 행여 공부에 방해될까 엄두도 못 내던 것을 해낸 것이다. 비워내고 채움으로써 비로소 내가 얻은 소소한 만족과 행복감은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잠시 잊고 있던 교재에 다시 눈이 간다. 이제 해결책은 상당부분을 버리면 된다. 버려야 채울 수 있고 비워야 색다른 사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분명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은 단순히 집안을 치우고 새 물건으로 채우는 것과는 다르다. 비우거나 제거한 공간에 새로운 지혜가 들어올 때에만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혜가 없으면 비우거나 버릴 필요성이 있더라도 대체되지 못한다. 대신 오랜 기간 동안 그냥 고정관념이나 통념, 타성의 형태로 이어져버린다. 따라서 이제 한 가지만 추가하면 된다. 버릴 수 있는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버릴 수 있는 용기는 교육자의 부단한 열정과 통찰력을 요구하지만 이를 통해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준다. 적어도 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안락함이나 타성에 젖어 다른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만나게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혁명적인 산업환경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교육의 틀도 크게 바뀌어야 한다라고도 말한다. 어느 날 불쑥 그러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나 적어도 새로운 지식과 생각이 언제라도 움틀 수 있는 여유 공간은 항상 마련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옛날 물건이나 의식들로 몸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에너지는 고갈되고 항상 과거에 묶여있게 된다. 결국 사람은 어제를 버려야 오늘을 맞이할 수 있고 오늘을 버려야 내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인 듯싶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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