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백헌 지음 《대전 예술 예인》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는 지난 1`월에 ‘내 일생의 마지막 평론집‘을 출간한다고 공언하며 《대전 문인 문학》을 냈었다. 그런데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또 한 권의 큰 책이 나오니 그 말은 거짓말이 된 셈이다. 그렇지만 거짓말이 된 것이 다행이다. 학문과 예술은 죽기 전까지는 마지막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학자나 예술가는 숨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하며 자신이 이룩한 모든 업적에 또 하나의 벽돌을 또 쌓으며 이를 남들에게 나눠주며 공유해 나가는 사람이다. 그것은 끝까지 하늘 꼭대기를 향해서 치솟으며 올라가다가 이카루스처럼 불타서 죽으며 남겨지는 인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은 칠순팔순을 넘기더라도 마지막 정년을 말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학문과 예술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지식과 판단력과 경험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므로 나이 들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힘차게 달려야 하며 만수무강의 잔칫상이나 받고 놀고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런 원로는 원로도 아니다. 건강만 허락된다면 쓰러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며 업적을 남겨야 한다.

《대전 예술 예인》은 송교수 아니면 아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을 해낸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어떤 세계적 석학이라도 한국의 진실을 한국인만큼 명확하게 증언할 수 없고, 한국인만의 슬픔과 기쁨과 노여움과 환희의 모든 호흡과 체온을 발산하는 것은 오로지 한국인만의 것이듯이 대전의 가락은 대전에 삶의 뿌리를 박고 살아온 사람 아니면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이 속에서 송 교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조건들이 더 있다. 그는 긴 세월을 대전과 그 주변에서 지식인이자 예술 비평가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전의 예술과 예인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바른 증언을 할 수 있는 증인이고 이 《대전 예술 예인》이라는 주제를 위한 저술가로서는 송 교수를 빼놓고 누구도 쉽게 감당해 줄 적격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전과 그 주변의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고 구순을 바라보는 이 시기까지 이만큼 거목으로 자라며 끊임없이 대전과 그 주변론을 증언해 온 교수 또는 문인은 송백헌이 가장 대표적인 조건을 간직해 왔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귀중한 가치가 나타난다.

1. 예술 문화사의 조감도

이것은 대전이라는 특정 지역의 ‘예술문화사’이며 이를 지극히 명료하게 조명해 나간 조감도다.

송 교수는 문학평론가지만 문학에 한정된 비평서가 아니라 문학비평가로서 축적해 온 역량과 경험을 대전 예술문화 전역에 적용해 나간 저서다. 단 이런 광역화는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따를 수 있다. 매는 높은 하늘에서 먼 지평을 바라보며 먹이를 찾는다. 그러므로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대신 근거리의 사물을 보는 시력은 약화 될 수 있다.

송 교수의 《대전 예술 예인》은 특정 일부 작가나 작품에 대한 조명이 아니라 한발 물러서서 그 시대의 집단적 양상을 살피는 형태이기 때문에 개인적ㆍ세부적 비평서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송 교수가 매처럼 높은 하늘에서 더 넓게 더 멀리 바라본 조감도의 성격이 매우 짙다.

2. 비평의 균형적 감각

대전 최초의 문화원 건물. 대전시 중구 선화동.
대전 최초의 문화원 건물. 대전시 중구 선화동.

대전 노래 반세기, 영화 50년, 대전 중구문화원 60년사, 예총 50년사 국악원 30년사 등은 5권의 예술사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서술형태가 그렇듯이 이런 문화사는 끊임없이 많은 부분에 대한 취사선택을 저술과정에서 지속해야 하는 것이며 문학과 미술과 연극 등 각 분야의 경중을 따지는 안목이 필요하게 된다. 이를 어기면 대전의 예술사가 미술 중심이 되거나 영화 중심이 되는 등 피사의 사탑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편중된 문화사가 되기 때문이다.

송교수는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고 비교적 고르게 예술의 각 분야에 대해 균형적 감각을 갖고 서술해 나갔다.

3. 시간과 공간의 짜깁기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의 관찰대상이 된다. 《대전의 예술 예인》이야말로 그 같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사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예술과 예술인을 논하려면 그 같은 발자취를 되밟아가며 오늘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명증한 논리를 바탕에 깔고 진술되고 있는지를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전의 노래 반세기(P11~17)'에는 일제식민지 체제하에서의 그들의 엔카(演歌)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대전소패’ ‘대전 행진곡’ 등에 대한 증언이 그것이다.

모던 대전, 반도의 도시 욧 호호호이

늘어서 있는 다섯 개 다리는 꽃 속에 꽃 속에

(중략)

사꾸라 꽃잎이 떠 있는 잔을 들어 욧 호호호이

사월 하순의 군기제 군기제

( 다이뎅 고우다 '대전의 소곡')

대전의 행정구가 읍(邑)으로 승격되고 다시 부(府)가 되던 1930년대 초에 이런 일본식 대중가요가 유행한 것 같다.

그런데 일제하 식민지배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가사만 보고도 울화가 치민다. ‘욧 호호이’라는 노래 후렴구는 일본인들이 소위 쪽발이 버선발에 허리를 반쯤 굽히고 잔망스럽게 춤추던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4월에 ‘사꾸라 꽃잎’이라 했으니 그들의 야외 벚꽃 놀이 풍경과 술냄새까지 풍겨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이에 대해서 송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대전의 옛 노래는 지금 한밭 땅 곳곳에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의 농요 · 민요 · 시조창 등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중략) 일본문화가 이 땅을 온통 지배하였던 식민지 시대에 우리 노래는 숨어서 흘렀다. 이것은 일제 침략이 경제적 군사적 지배만이 아니라 예술문화까지 이런 형태로 지배하고 우리의 본래적인 문화는 지하로 숨어들었다는 비참한 현실을 말한 것이다.

이런 증언은 이 예술문화사가 역사적 증언으로서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오늘의 대전 문화 속에도 틀림없이 일제하의 엔카(演歌)의 잔류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서구문화의 도입과 함께 한류 열풍으로 달라진 오늘의 모습은 일제식민지시대의 엔카와의 비교 형태를 통해서 매우 선명하게 과거의 슬픔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이는 이 예술 문화사가 씨줄 날줄의 교직(交織)형태로 과거를 생생하게 되새기면 그 씨줄 위에 날줄을 그어서 역사적 감각을 훌륭히 나타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4. 정확성과 객관성

송 교수는 이처럼 지난날의 시간의 씨줄에 날줄을 교차시키고 있지만 균형적 감각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주관적 비평의식도 많이 견제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일제 식민지배하의 엔카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항일의 민족적 감정 등 송 교수의 주관적 감정은 다분히 개입되지 않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역질이나 분노의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1968년 무렵에 한국 대표적인 친일 시인을 존경스럽게 모신 대전문인행사 등도 비판이 따를 수 있는 사건이지만 송교수의 감정은 개입되지 않고 있다. 또 모 소설가를 10년 가까이 예총지부장으로 모시고 특별히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없는 것도 바른 운영은 아니었음을 의미하지만 송 교수는 사실 진술 이상의 선을 넘지 않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비평적 작업과 평가는 후배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여유만만의 자세 때문일 것이다.

옛 시민관. 대전시 중구 선화동 .현 NC백화전 중앙역점.
옛 시민관. 대전시 중구 선화동 .현 NC백화전 중앙역점.

5. 냉엄한 기록성

이런 여유와 침착성은 예술문화사의 객관성 유지에 필요하다는 것이 송교수의 입장이라고 이해되며 이 때문에 송 교수는 좀 더 냉엄한 기록성과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 교수는 명확한 증언을 위해서 생존자 탐방과 함께 풍부한 자료 보존과 발굴도 감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송 교수는 ‘대전의 영화 50년’에서 영화인 총연합회가 창립되고 발전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져내고 있다. 이에 참여한 영화배우, 감독 기타 많은 사람들을 찾아내고 이들의 증언을 듣고 있다. 갑천영화제, 백제 단편영상 예술제와 포스터 등 많은 실제적 자료에 의한 영화사가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축사> <대회사> < 취지문><격려사><환영사> 등을 직접 탐방 인터뷰나 간접적인 자료 발굴을 통해서 현장취재의 객관성과 정확성과 열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예술 활동은 아니지만 이를 위한 중요한 배경이던 대전문화원의 긴 역사를 살핀 것도 매우 큰 업적이다.

6. 예술문화 도시의 이정표

이 저서는 대전과 그 주변의 문화권을 조감도의 형태로 조명해 나가면서도 중요한 요소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성실성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다른 어느 지역도 이만큼 정확한 자료와 증언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비평적 안목으로 기술해 나간 저서는 드물 것이다.

이런 저서는 매가 높은 하늘에서 부감한 조감도가 그렇듯이 아주 먼 곳까지 바라보며 미래를 측정할 수 있는 명확한 이정표가 된다. 그리고 하늘 높이만큼 세상은 밝게 보이듯이 이 조감도는 밝은 미래상을 그려 주고 있다.

대전은 한반도의 수도가 아닌데도 일제 식민지의 추악한 냄새가 서울 못지않게 진하게 풍긴 시절이 있다. 일제가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고 엔카를 유행시키며 이를 식민지 놀이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전은 서울과 너무 가까운 거리 때문에 독립적인 예술 문화가 성장할 틈을 주지 않았다. 대전은 다른 목적지를 향한 중간적 기착지로 삼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전은 특히 엑스포를 치르고 많은 전국적 또는 국제적 행사를 치르면서 세계 속의 독립적인 예술문화 도시로 발전해 가고 있다. 특히 이 저서는 식민지배와 군사독재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구적인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 주의에 매몰되기 쉬웠던 대전이 지금은 얼마나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지고 있으며, 왜 달라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민주화운동인 4ㆍ19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촉발지가 된 곳도 대전이다. 지금은 백발노인으로서 이 책에 기록된 김용재 시인 등이 어린 학생시절에 독재의 횡포에 분노하고 항거했으며 이를 기리는 행사가 4ㆍ19나 3ㆍ1절처럼 국가행사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로 말미암아 대전은 민주화 역사의 도시가 되고 또 예술문화의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고 이 저서는 이를 확실히 밝혀 나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송 교수의 이 저서는 대전의 밝은 미래를 위한 귀중한 이정표의 역할을 앞으로 매우 충실히 해 나갈 것이다.(종려나무 /1만5000원)

글=김우종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평론가, 화가, <창작산맥>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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