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택(본지 논설위원 / 서경대 철학과 교수)

반성택 서경대 교수
반성택 서경대 교수

이제 거리에는 연말 분위기가 묻어난다.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백화점의 눈부신 네온사인은 연말 분위기를 더욱 조성한다. 크리스마스는 교회보다는 백화점에서 시작되고 오래 지속된다.

이렇게 어느 해처럼 연말을 맞고 있지만 돌아보면 2018년은 평창올림픽과 한반도 대화로 갑작스레 개막됐다. 저러한 이벤트들은 20세기 한반도 역사에 뿌리를 두고 이어져 왔다. 왕국의 멸망과 식민지, 분단과 전쟁, 민주공화국의 가난과 경제발전, 독재와 민주화 등의 온갖 스토리텔링이 거기에 깔려 있다.

하계올림픽은 동계올림픽과 다르다. 우리는 여름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다. 달리고 수영하면서 자연을 맨살로 접한다. 하계올림픽 종목은 대개 원초적이다. 반면 겨울은 다르다. 동토를 극복하며 활용하는 장비가 동계종목의 주요 요소다. 그래서 동계종목은 대개 인위적이다. 수준급의 물적 토대가 뒷받침돼야 한다. 경기용 장비가 있어야 하고, 이의 활용에 적합한 경기 인프라가 구축돼야 하며 무엇보다도 장비 의존적인 동계종목에서의 개최국 경기력도 수준급이어야 한다. 20세기 한반도의 지난한 역사를 거쳐 온 우리가 이 수준에 있었기에 올림픽은 그 추웠던 평창에서 열린다. 여기에 북한, 분단 한반도는 말 그대로 편승한다. 이 편승은 대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이른바 올림픽 정신에 해당한다.

이러한 2018년은 많은 이들의 역사적·존재론적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활성화시켜 왔다. 2018년이 연말 분위기로 소진되거나 어느 해와 동일화되지 않았으면 한다. 연말 콘서트 현장에서 지나가는 한 해를 뒤돌아보며 새로운 신년을 기약하는 식으로 2018년의 스토리를 초연하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평창올림픽과 함께 갑작스레 시작된 한반도 평화로의 시간이 1년 단위로 정산하고자 하는 익숙한 시간관념을 넘어서 이어지길 소망한다. 2018년의 흐름이 이후에도 이어져 그때가 새로운 우리로 향하는 시대적 분수령이었다는 역사의 평가를 기다린다. 이러면서도 오늘의 시간 이해가 연간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기업체 마인드에 이미 익숙하기에 걱정도 한다. 연말과 크리스마스의 도래를 백화점이 선도하는 세태에서 벗어나 올해의 정신을 이어가고 싶다.

또한 2018년부터의 시간이 앞으로 이어질지를 승인하고 결정한다는 미국의 시간도 걱정스럽다. 지금 미국은 오늘날 한반도의 변화 에너지 앞에서 정상회담 이후의 행동이 없다. 아마 그들은 한반도 역사 속에 투영되고 이해된 자신들의 모습을 현재에서 바라보아 현상적으로 이해해서 그러할 것이다. 그들에게 이른바 내적 역사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1945년 9월 이 땅의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던 미군, 1950년 초의 철군, 1980년 광주의 미국을 필자는 대학에서 알았다. 그 이전의 미국은 달랐다. 미군은 포천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양동이로 날라 주었다. 그 우유는 맛있었다. 미제란 다른 나라였으면 미국 제국주의일 수 있었겠지만 한국 초등학생에게는 미국산 물품으로 각인됐다. 미제는 오늘의 한국에서, 코스트코에 넘쳐난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미제를 카트에 담으며, 필자도 그렇다.

미군 우유를 얻어먹은 초등학생을 거쳐 1980년대 한국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나아가 정치철학에 관심을 두는 교수로 살면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기도 하고 오바마 전 대통령의 가족 사진을 볼 때도 있다. 그러는 가운데 2018년을 떠나보내는 물리적 시간인 연말에 서 있다.

시간은 오늘날 물리적으로 측정되곤 하지만 시간은 체험돼 내 안에 쌓인다. 그래서 역사의식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이제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해 세모를 알리는 지금,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출생한 이들이 3만 달러 소득과 광장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채우는 이 공동체에 어느 정도는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한 명의 시민으로, 아울러 한 명의 지식인으로 발언하고 싶다. 2018년의 뜻을 잇는 2019년을 고대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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