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계절이 바뀌어 찬바람이 불 때가 돼서야 ‘이제 겨울옷을 만들어 팔아볼까’라고 생각하는 옷 장사는 없다. 한여름에 겨울을 생각하고, 겨울에는 이미 한여름을 대비해 옷을 만들어야 한다. 수능이 끝나고 대입 전형이 한창인 때에 대학의 학번 정책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너무 이른 듯해 보이지만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학번은 당연히 학교에서 만들어주는 것 아닌가? 그동안 학번에 대해 누가 무슨 문제 제기를 했던 적이 있었나? 학번에도 무슨 정책이 필요한가? 누군가에게 학번에 대해 논의해 보자고 제안하면 이런 생각들이 먼저 들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학번은 학교에서 만들어주는 것이었고 누구나 이를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학번을 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세심한 행정의 손길이 필요하다. 학번을 부여하는 대학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생 모두 관행에 익숙해져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의 학번부여방식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은 학번을 앞의 네 자리는 입학연도, 그 뒷자리는 이름순과 같이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일련번호를 부여한다. 일부 대학은 중간에 학과코드를 하나 더 넣기도 한다. 이렇게 부여된 학번은 관리에 편한 장점은 있겠지만 서열, 집단, 군대, 통제, 관료적 등과 같은 단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학생들이 학번을 선택하도록 하면 어떨까? 필자는 2013년 신설된 전문대학원에 근무하게 되면서 이 생각을 직접 실현해 볼 기회를 얻었다. 이른바 ‘학번 선택제’ 기획안을 만들어 내부의 허락을 받았다. 입학연도와 학과코드는 학교 기준에 따르되, 맨 뒤의 네 자리는 기존의 일련번호 대신 9999개의 번호 중에서 학생들이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첫 학기에는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서 학번을 선택하도록 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합격자 공고를 낼 때 이 프로그램을 연결해 두고 선택하도록 했다. 첫 학기에 신입생 19명이 선택한 학번의 끝 네 자리는 생년월일, 전화번호, 기념일 등 기억하기 쉬운 번호(13명), 학부 시절의 학번(2명)이었고, 한 명은 1004번을 선택했다. 여태껏 주어진 학번에 익숙해진 대학원생들의 현실적인 선택 결과였다. 이 학번은 ‘당신이 선택한 학번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곤 하면서 신입생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이 질문에 어떤 학생은 이성 친구와 만난 날을 학번으로 선택했다고 대답했다. 이 학생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정감 어린 학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번은 창조성, 다양성, 자유로움, 아름다움, 능동적 참여 등과 같은 이미지와 연결된다.

지금의 학번 체계는 주민등록번호와 닮아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강력한 주민등록번호는 1962년의 주민등록법 제정으로 시작돼 1968년의 이른바 ‘1·21사태’를 계기로 크게 강화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13자리 체계로 자리 잡았다. 정부는 늦게나마 이에 대한 부작용을 인식하고 정보보호를 강화하고 나섰지만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궁여지책보다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자체를 고민해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관리 위주의 학번에 길들여진 지 오래다. 그래서 사회의 코드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기 더욱 어렵다. 지금의 학번은 대학의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학번에 학과코드와 같은 정보가 들어가 있으면 학문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학번을 다시 되돌아보고 나아가 학교에서 사용하는 다른 번호체계도 둘러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필자의 졸저 《대학행정인의 생각》에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학번선택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면 필자는 기꺼이 도움을 드릴 수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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