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LS산전 전력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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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학년도 수능시험 언어영역 31번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지문은 16, 17세기 서양의 우주론의 정립이 중국과 동아시아에 끼친 내용을 다루는 내용으로 단시간의 독해력으로는 접근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오답률 81.8%를 자랑하는 이 문제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궁금해 관련지문을 자세히 읽어봤다.

언어영역 28번에서 31번과 연계돼 있는 이 지문은 총 8개의 문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16세기 서양우주론의 경험주의와 수리과학 기반의 우주론이 중국으로 전파되며 회통되는 시도로 시작된다. 이를 위해 글쓴이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의 우주론의 형이상학적 관념과 수학적 결과의 모순을 시작으로 치열한 논쟁 끝에 다른 두 물체 사이의 역학적 상관관계를 정의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등장시킨다. 31번 문제는 바로 이 문단과 연관돼 있다. 문제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추상적 물리개념인 ‘질점’과 ‘부피요소’ 그리고 ‘거리’라는 개념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혼돈을 주는 트릭에 있다. 천체 내 밀도의 부피요소의 합과 천체 밖 질점과 이 두 물체 간의 거리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글 속에서 발견해 냈다면 문제의 정답은 보다 쉽게 눈에 들어왔을 것으로 사료된다.

흥미로 시작했던 문제풀이를 끝내면서 드는 찰나의 생각은 ‘왜 이렇게 뛰어난 통합지문을 바탕으로 우리는 단순한 객관식 문항을 나열하지?’였다. 만약 문제가 특정 지문의 숨은 뜻을 주관적으로 서술하는 방향이었다면, 만약 지문을 읽고 보다 넉넉한 시간 동안 지문의 개념을 재해석하는 문제였다면, 주어진 객관식 문항 정도의 모범답안은 아니겠지만 자신만의 창의적인 생각들을 개진했을 것이다. 물론 채점의 기간과 시간은 매우 길어지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욱 공정하고 수험생들이 보다 납득할 수 있는 시험이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장이나 글을 읽고 그 뜻을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쉽게 이해하고 풀어내는 능력을 ‘독해력’이라 하고, 자신이 독해한 내용을 구성해 글로 표현하는 것을 ‘문장력’이라 한다. 대한민국 교육은 2019학년도 수능 언어영역 31번 문제를 통해 과연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독해력과 문장력의 중요성을 전달했을까? 오직 실력 또는 운으로 문제의 정답을 맞힌 18.2%의 학생들의 변별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대학입시를 잘 치르고 대학합격의 달콤함과 함께 2018년 겨울을 보내는 예비 대학생들에게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여러분이 진학할 대학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것이다. 당장 전공에서 통용되는 기호나 문자, 이론에서부터, 한정적인 자원 내에서 자기만의 정답을 자신의 글과 말로 창조하고 자신의 결과물을 격정적이고 갑론을박을 주고받는 토론을 진행해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하기까지, 일종의 어른이 되기 위한 자기독립과정을 4년간 경험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교육이 가지는 기조에 객관식 점수높이기에 익숙한 그대들이 과연 제대로 성장해, 정글 같은 사회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주기 바란다.

단순히 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획일적 문제풀이방식을 강요한 우리의 입시제도가 작금의 현실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학생들의 교육편의’라는 미명하에 수없이 손댄 누더기 같은 고등교육과정과 단편적인 교육방식, 이것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핀란드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진행했던 서열교육을 단호히 거부하고 ‘경쟁이 없는 교육’이란 모토 아래 ‘과목’이란 지식 칸막이 개념을 타파하고 통합교육, 과정중심교육으로 세계최고의 경쟁력 있는 교육서비스를 구축했다. 교육부는 지난 교육과정에 대한 통렬한 자기부정과 현실적인 벤치마킹을 바탕으로 잘 듣고, 잘 읽고, 잘 이해하고, 다채롭게 표현하는 교육과정으로의 변화를 이뤄내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2018년이 열흘 남짓 남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기간 고3수험생들은 오늘도 2019년에 있을 2020학년도 수능시험 고득점을 향해 단편적 지식을 암기하는 비생산적인 일정과 비용을 소모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모적인 방식을 버리고 당장 시험방식의 변화를 만들자는 주장은 현실성 없고, 한없이 작은 메아리에 불과하겠지만, 지식을 나름의 의미로 소화하고 다채롭게 표현하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이라는 시대정신은 이러한 낡은 장벽을 조금씩 벗겨낼 것이다. 보다 나은 학생들의 미래를 꿈꾸며 2018년도를 정리해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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