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권혁웅 교수
권혁웅 교수

사람들이 한 여자를 잡아 예수에게 끌고 와서는 물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듭 묻자, 예수가 대답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쓰기를 계속했다. 사람들이 가책을 받아 하나둘씩 흩어졌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얘기다. 이 이야기에서 끝내 전해지지 않는 것은 그때 예수가 땅바닥에 썼다는 글의 내용이다.

최근에 변신 이야기를 읽다가 한 가지 단서를 얻었다. 그리스의 하신(河神) 페네오스에게는 이오(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제우스가 그녀를 탐냈다. 소녀는 달아났으나 제우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헤라가 바람둥이 남편을 의심해서 쫓아오자, 제우스는 그녀를 암소로 변신시켰다. 헤라는 아르고스를 시켜 암소로 변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들판에서 풀을 뜯던 그녀가 아버지를 만났다. 말을 할 수 없던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가 발굽으로 땅바닥에 글을 썼다. 아버지가 그녀를 알아보고 탄식했다. “아아, 슬프다! 네가 바로 내가 온 세상을 찾아 헤매던 내 딸이란 말이냐!”

이오가 발굽으로 썼다는 글은 아마도 자기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오(Io). 이름을 단순하게 지어서 다행이다. 길고 복잡한 이름이었다면 발굽으로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 이오도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한 여자와 같은 처지다. 부정(不貞)을 벌하려는 무서운 여신과 군중의 손에 이미 돌이 들려 있다. 이오는 최고신의 탐욕의 희생자이지만 고대의 율법은 가해자와 희생자를 따로 구별하지 않는다.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혹은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 둘은 무참히 희생되고 말 것이다.

신들의 욕망에 희생되고 저주까지 받아서 동물로 전락한 이오, 10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던 이오, 그녀가 손가락마저 잃은 손으로 간신히 땅에 썼던 글자가 바로 예수가 썼던 글자가 아닐까. 그 이름은 운명 혹은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변덕스럽고 탐욕스러운 권력에 희생된 이들이 간신히 적을 수 있었던, 자신들의 존재 증명이다. 본래 민(民)이란 백성이 아니라 한쪽 눈을 잃은[盲] 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자들에게서 한쪽 눈을 뺏으면, 거리 감각이 없어서 전투력을 상실하지만 앞은 볼 수 있어서 노동력은 보존된다. 이오는 바로 그런 힘없는 민(民)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예수는 손에 돌을 감춘 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율법에 따른다면 너희가 손에 든 돌은 너희 머리를 향해야 할 것이다. 헤라의 질투 역시 최고 권력인 남편을 향해야 할 것이고 아르고스의 눈은 남편의 행실을 살피는 데 써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였던 조프루아 토리는 이오(Io)의 이름에 모든 알파벳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A가 두 개의 I(혹은 두 개의 I와 반쪽짜리 I)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B가 I에 의해 '두 동강 난' O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중략) 다른 모든 철자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방금 언급한 두 철자 중 하나 또는 둘 모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C는 오른쪽이 살짝 열린 O이고, D는 I와 O의 반쪽이 결합한 것이며, E는 하나의 I에 I의 잘린 마디 세 개가 [수평으로 교차] 조립된 것이다.”(대니얼 헬러-로즌, 에코랄리아스, 154쪽에서 재인용)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자들, 서체들은 막대기(I)와 원(O)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자는 민중의 이름 위에 지어졌다. I와 O는 ‘직선’과 ‘원’ 혹은 ‘가다’와 ‘돌아오다’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식, 기술, 학문은 민중의 동선, 생활상, 삶 위에,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이름 위에 축조돼 있다. 대학의 학문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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