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처럼 큰 잔에 따라서 파는 술집

흔히 “선술집” 또는 “목로집”이라고도 부르는 “대폿집”은 별다른 안주가 없이 큰 그릇에 따라서 파는 술집을 일컫는데 옛날에는 이를 “목로술집”이라고 하였다. 이 “목로술집”은 큰길가에도 더러 있었지만, 주로 큰길에서 약간 물러난 뒷골목이나 시가지(市街地)의 으슥한 곳에 많았다. 당시에 “목로”의 시설로는 사방이 터진 온돌방에 큰 쇠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퍼서 언제나 물을 끓게 하였다. 그 가마솥 옆에는 주로 여자주인이 앉아 있고, 주인의 뒤에는 목판을 비스듬히 세운 곳에다 갖가지 마른안주를 전시하여 놓았었다. 이곳의 마른안주로는 쇠고기를 말린 우포(牛脯)와 물고기를 말린 어포(魚脯)를 주로 하여 여러 가지 말린 나물을 진열하여 놓았고, 한편으로는 진안주를 큰 목판에 넣어 놓았는데 너비아니라 하여 불고기의 재료인 쇠고기와 날 돼지고기, 삶은 돼지고기, 편육(片肉)과 빈대떡, 산적 등과 계절에 따라 구운 생선이나 회 등도 있었다. 그 앞에는 긴 마룻장 같은 목로(木爐: 술집의 술청에 술잔을 벌여 놓는 상(床)으로 길이가 썩 길고 좁으며, 목판처럼 되어 있다.)를 놓아 술잔과 안주 접시를 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다 큰 화덕을 세우고 숯불을 벌겋게 피운 뒤 석쇠를 걸어 놓아 언제나 얹기만 하면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앞에는 안주를 굽는 남자인 “중노미”가 큰 젓가락을 들고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대개 큰 “목로”에는 안주를 보기 좋게 늘어놓아 손님을 끌고, 술꾼들은 그것을 바라보고 차마 지나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김치 등 기본 안주 외에 술과 안주를 따로따로 시키고, 값도 따로 지불하나, 옛날에는 술을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안주를 달리 주었는데 만약 이때 술을 많이 먹지 않으면 시원치 않은 안주를 주게 된다. 따라서 이때 술값은 내어도 안주 값은 받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술꾼들이 들어와서 주인에게 “술 몇 잔을 내시오” 하면, 안주를 굽는 “중노미”가 석쇠 위에 안주를 몇 점 집어다 올려놓고, 주인은 옆에 있는 술독에서 긴 술국자로 손님이 청한 대로 술을 퍼서 양푼 같은 데에 담아 끓는 가마솥에 이 양푼을 띄워서 술을 데우고 손님 앞에는 큰 사기잔을 갖다 놓는다. 가마솥에 양푼을 넣을 때와 데울 때, 그리고 술잔을 놓을 때는 일부러 소리가 나게 하여 취흥이 돋도록 한다. 술꾼이 데워진 술을 사기 술잔에 그득히 부어 한잔 들이키고 술잔이 입에서 떨어질 때 안주를 굽는 “중노미”는 안주접시를 목로에 놓으면서 “몇 잔 안주요!”하며 술꾼들이 술값을 계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목로”를 “선술집”이라 하는 것은 이 “목로술집”에서는 백 잔을 마셔도 꼭 서서 마시고 앉지는 못하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곳에서 앉아서 마시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패의 술꾼들이 “점잖은 여러 손님이 서서 마시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주저앉는담? 그 발칙한 놈을 집어내라!”고 큰소리를 치며 시비를 걸고 그로 인해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선술집“이 일제 강점기의 말기에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였기 때문에 없어지다시피 되었다가 조국 광복 후에 다시 나오기는 하였으나, 술에 안주를 끼워서 주는 풍습은 사라지고 “너비아니”는 “불고기”로 “술국”은 “해장국”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 대포처럼 큰 술잔에 술을 마신다 하여 ‘대포 한 잔’이란 말이 생기게 되어 술집 이름도 “대폿집”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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