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의 글 이야기] 아침 이슬과 H₂O
[권혁웅의 글 이야기] 아침 이슬과 H₂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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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권혁웅 교수
권혁웅 교수

투르크의 전제군주였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the Second)는 자국에 유입되는 모든 화학책에서 H₂0를 지우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이 기호는 ‘물’이 아니라 ‘하미드 2세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흔히 글이 글쓴이의 사상, 감정, 세계관을 기록한 것이며, 독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그 기록을 대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모든 글은 읽는 이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글에서 우리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맞닥뜨린다. 19세기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책임자였던 하미드 2세는 민중의 보이지 않는 분노와 경멸을 저 기호에서 읽었을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언어학자인 알베르트 그륀베델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륀베델은 에트루리아 문자의 독해에 도전해 그 결과를 1922년에 책으로 펴낸다.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1세기까지 존속했던 나라로, 초기 로마와의 경쟁에서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다. 그는 주변의 어떤 언어와도 닮지 않은 이 민족의 언어를 해독했다고 선언했으나, 그의 책은 경악과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가 해독했다는 텍스트가 모두 일종의 악마나 주술에 관한 황당무계한 환상이나 온갖 성적 도착의 거대한 일람표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에트루리아어로 된 텍스트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동경과 사랑을 모조리 털어놓는 거울처럼 보고 말았”던 것이다(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7쪽). 하나마나한 소리로 가득한 자기계발서나 힐링을 표방한 책들이 그토록 인기를 끄는 비결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 책이 주는 위로는 실은 저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이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지의 메커니즘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금지하는 자가 욕망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욕망은 늘 위반으로만 측정된다. 금지가 있어야 그것의 위반이 있으며, 따라서 금지된 것만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1971년 10월 정부에서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퇴폐풍조’로 규정하고 이를 엄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길에서 가위와 자를 들고 다니며 남성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여성의 치마길이를 재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것은 실은 촌극이 아니다. 머리숱이 적어진 중년의 질투가, 젊은 여성들을 독점하지도 소유하지도 못하는 권력자의 시기가 그 촌극의 원동력이었으니 말이다.

‘아침 이슬’이 금지곡이 된 사연도 사정은 비슷하다. ‘아침 이슬’은 1970년 세상에 나왔고 1971년에는 정부에 의해 건전가요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1975년 금지곡이 된다. 이 노래에서 어떻게 투쟁이나 혁명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아침 이슬을 젊은이들이 애창하게 되자, 당시의 독재자는 자신의 치세가 ‘긴 밤’에 속한다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된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고 할 때, 독재자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이 ‘무덤’뿐이라는 것을, 죽음과 죽임의 교환체계 위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노래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국회의원 세 사람이 극우 선동가를 국회에 데려와 입에 담기 민망한 주장을 했다고 한다. 그 주장의 거짓됨이나 그 주장에 깔린 저열한 의도 따위야 말할 가치도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주장에서 그들 자신이 무엇을 읽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은 어쩌면 아직도 살아 있는 학살자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삼았던 게 아닐까. 북한군이라도 있었다고 가정해야 정당화될까 말까 했던 그 끔찍한 권력에의 욕망을.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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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칠두 2019-03-21 20:37:07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