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캠퍼스의 2월은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우리 팀은 한 해의 일들을 주제별로 정리해서 연간 활동보고서를 만들었다. 팀이 생긴 첫해부터 매년 2월이면 항상 발간해 왔는데 4년 차인 올해는 분량이 900여 쪽이 될 만큼 두툼해졌다. 이 보고서는 주요 부서에 책자로 배포하고, 또 교내 네트워크 시스템에도 원문을 그대로 공개한다. 팀의 공식적 활동은 최대한 기록·공개돼 조직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팀의 생각이다. 이렇게 2월의 공적인 업무는 정리돼 갔다.

이제 다른 하나의 마무리가 남아있다. 우리 팀이 신설된 이후부터 4년간 조직을 이끌어 온 본부장이 다시 교수 본연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헤어짐을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본부장을 위한 기념앨범을 제작하기로 했다. 팀원끼리는 이 비밀작업을 본부장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YC 프로젝트’라고 했다. 4년을 되짚어 우리의 추억을 간직한 사진을 모아 주제별로 정리를 해 나가다 보니 처음 생각보다 분량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의미도 더 깊어졌다. 이 일은 팀원 N이 주로 맡아서 진행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N은 2월 말로 퇴사를 해야만 하는 당사자였기에 우리는 본부장뿐만 아니라 N과도 이별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는 작업 중간에 목표를 일부 수정했다. 본부장만을 위한 기념앨범이 아니라 우리 팀 모두를 위한 의미 있는 기록물을 만들기로 했다. 팀원들은 이 일에 점점 더 몰입했는데, N이 우리 팀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 밤이 돼서야 이 작업은 완성됐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우리 팀의 철학은 무엇이었고 어떤 점이 달랐을까?’라는 자기 성찰적 대화를 많이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전체 조직 속에서 팀과 개인의 역할을 더 객관적으로 통찰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팀원 모두가 서로 공통된 감정을 확인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일을 통해 한판의 신명 나는 놀이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기록물의 제목은 작업의 마지막 순간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단어로 압축됐다. ‘일의 놀이터, 4년의 기록’이라고. 그 첫 페이지를 열면 ‘지금까지 이런 팀은 없었다. 이들은 일꾼인가 놀이꾼인가’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 안에는 모두 팀원들의 진심을 그대로 담았다.

다음날 본부장을 포함한 팀원 모두가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떠났다.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해 간 플래카드를 꺼내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날 늦은 시간,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N이 가장 먼저 내렸다. 우리는 기차 안에 앉아 있었고 N은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인사였다.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우리는 각자의 목적지에서 하나둘씩 내려 집으로 향했다. 2월의 마지막 날, 본부장은 ‘일의 놀이터’를 들고 사무실을 떠났고, 우리는 먹먹한 가슴을 안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2월은 마무리됐다.

니체는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그리고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라 했다. 직장에서 우리는 때로는 낙타로, 때로는 사자로, 때로는 아이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나는 한 총장의 임기 끝에서 우리 팀에서 잠시나마 아이의 모습을 언뜻 봤다. 그것은 직장인으로서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제 떠난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3월이 시작됐다. 새로운 리더십이 자리를 잡고, 새 가족을 맞이하는 활기찬 계절이다. 모두가 그 푸른 바다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강릉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바닷가로 달려가 아이처럼 새롭게 모래성을 쌓고 놀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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