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기 청원고 교사

배상기 청원고 교사
배상기 청원고 교사

5세 된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물어야 할까?

필자가 Kathy K. Clayton 박사의 강연에서 들은 내용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유치원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한 이벤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5세 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준비됐는가를 확인하는 시험이다. 그것은 여러 명의 교사가 각 테이블에 앉아서 아이마다 한 가지씩의 시험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색깔, 숫자를 외우는 준비를 시켜서 그곳에 보낸다. 한 소녀의 어머니도 그렇게 준비시켜 딸과 함께 그 시험에 참여했다.

소녀는 색깔을 맞추거나 숫자를 외우는 시험을 치렀다. 여러 테이블을 돌아가면서 시험을 치렀고 마지막 시험 테이블로 갔다. 그 테이블에는 크레용 1박스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로 온 소녀에게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크레용으로 네 이름을 써보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소녀가 자기의 이름을 쓸 줄 아는가를 알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 소녀는 크레용으로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얼마를 기다리던 교사가 다시 말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색으로 이름을 써 보렴.”

그러나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소녀가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실망하지 말아라. 네가 학교에 오면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줄 거란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실망해 참을 수 없었던 엄마가 그 소녀를 테이블에서 끌어내어 다그쳤다. 집에서 그렇게 많이 가르친 것인데 제대로 못 쓴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애, 도대체 왜 너의 이름을 쓰지 않은 거니? 너는 네 이름을 쓸 줄 알잖아? 이 엄마가 너를 가르쳤잖아!”

소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그 크레용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을 고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크레용 상자에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핑크색 크레용이 없었어요.”

그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었다. 엄마가 가르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교사의 말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는 이름을 쓰라는 지시보다 가장 좋아하는 크레용을 고르라는 지시가 우선이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크레용이 있어야 이름을 쓸 수 있는데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핑크색이 없었기에, 이름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크레용을 집어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교사는 크레용 상자에서 한 가지 색을 골라 이름을 쓰라고 했어야 했다. 아니면 크레용 상자에 있어야 하는 모든 색을 갖춘 다음에 원하는 색을 고르라고 했어야 했다. 그래야 그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교사는 ‘네가 네 이름을 쓸 줄 아는지 알고 싶구나. 네 이름을 써 볼래?’라고 단순하고 정확하게 물어보았어야 했다.

우리는 완전한 상황을 만들지 않은 상황에서 완전한 상황에서처럼 아이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가진 생각과 능력의 범위를 모르면서 평가하고 단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우리의 평가가 제대로 됐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부차적인 것을 앞세워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이름을 쓰는데 좋은 크레용을 고르라고 제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방법과 도구를 제한하는 것이 어른으로서 아이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핵심을 비껴가는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핵심에 대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정확하게 묻자. 아이가 정말 이름을 쓸 능력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요구를 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이름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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