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여자대학교, 독립운동 지원 위해 결사단체 조직
배화여자대학교, 3·1운동 가담하고 졸업생 옥고 치르기도
태극기 제작 및 배포, 독립선언문 배포, 기습 만세운동 등 3·1운동 참여
신사참배 요구에 불응, 폐교 맞기도…재건 통해 항거 승리 거둬

[한국대학신문 허지은 기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숭의여자대학교와 배화여자대학교는 3·1운동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이들 대학의 구성원들 역시 일제에 항거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을 지켰다. 이들에게 있어 교육은 그 자체로 국력을 기르는 독립운동의 하나였다. 이 때문에 두 대학의 현존은 독립운동의 승리를 의미한다.

송죽회(송죽결사대) 일원이었던 김경희(앞줄 왼쪽), 김신희(앞줄 오른쪽)
송죽회(송죽결사대) 일원이었던 김경희(앞줄 왼쪽), 김신희(앞줄 오른쪽)

■숭의여자대학교, 머리 자르고 태극기 만들며 독립 운동…폐교 딛고 재건 = 김경희·최형록·이효덕·안정석·구순화·김온순 등의 독립유공자를 다수 배출한 숭의여자대학교의 시작은 1903년 평양의 조선 최초 여학교인 숭의여학교다.

1908년 5월, 개교 6년 만에 다섯 명의 학생이 제1회 졸업생에 이름을 올렸다. 김보원·김유선·김경희·김애희·김신보가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3·1만세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선다.

김보원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고 1919년 ‘애국부인회’를 조직한다. 애국부인회는 뜻을 함께할 이들을 모으고 회비를 걷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김유선은 3·1운동 후 전도대를 조직해 독립정신 함양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송죽회’는 숭의의 학생들이 가진 독립의 열망을 가장 잘 보여준다. 김경희는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황애덕 선생과 함께 1913년 독립운동을 하는 여성 비밀 결사대인 송죽회를 조직했다. 당시 송죽회라는 이름은 비밀이었고, 점조직으로 운영했다. 송죽회 대원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모금활동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송금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또 3·1운동 전 몰래 200여 개의 태극기를 만들어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정책이 ‘민족말살정책’으로 한층 노골적으로 변하면서 탄압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이 당시 일제가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와의 대립은 더욱 심화됐다. 1935년 12월 4일, 평양시 주최의 일본 천황 둘째 아들의 명명식 행사에서 평양신사에 대한 참배 강요가 이어졌고, 숭의여학교와 숭실학교는 평양신사 앞까지 갔다가 고의로 참배를 피한다.

이후에도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가 계속됐으나 당시 숭의여학교 교장이었던 선우리 교장은 요구를 거부하며 1936년 1월 18일 답변서를 제출한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숭의여학교를 폐교하고, 선우 교장을 직위해제하기에 이른다.

일제의 강요에 항거하다 폐교를 한 숭의여학교는 1953년, 졸업생들에 의해 재건된다. 그 자리는 우연히도 일제의 탄압을 상징했던 남산 경성신사 자리였다. 숭의여자대학교의 모체는 보육과였던 만큼, 이후 전문 여성 직업인을 양성하는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숭의여자대학교 역사관에 전시돼 있는 평양 숭의여학교 캠퍼스 모형. (사진=허지은 기자)
숭의여자대학교 역사관에 전시돼 있는 평양 숭의여학교 캠퍼스 모형. (사진=허지은 기자)

1924년 유치원 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보육과를 설치한 이후 1927년 초급대학 학제를 인정받았는데, 재건 후에도 이 전통을 계승하고자 보육학교 설립이 추진된다. 재건을 준비하던 당시 숭의여학교 출신인 이영보 선생이 한국 보육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를 숭의학원이 흡수 통합해 ‘숭의보육학교’가 출범한다. 이후 ‘숭의보육전문학교’ ‘숭의여자전문학교’를 거치며 학과 증설이 이뤄지고, 현재의 ‘숭의여자대학교’가 됐다.

1910년 배화학당 1회 졸업생.
1910년 배화학당 1회 졸업생.

■배화여자대학교, 포기하지 않았던 ‘대한독립만세’의 구호 = 배화여자대학교는 1898년 미국 감리교 캠벨 선교사가 세운 배화학당에서 출발했다. 배화학당에는 민족운동가 남궁억 선생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화시켰다. 이후 덕성여대를 세운 차미리사 선생도 이 당시 배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많은 민족주의 교사들이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런 교육을 받은 배화학당 학생들 역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고, 3·1운동에도 참여한다.

3월 1일을 며칠 앞둔 2월 27일, 배화학당 학생대표 김정애와 김해라, 최은심은 전교생을 동원하기 위해 연락망을 구축했으며 김정애는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배화학당에 몰래 갖다두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지난 시각 시내로 나가 선언문을 배포했다.

3월 1일에는 감시로 인해 봉기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에 참여했고, 3월 10일에는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9월 개학 후에는 교사가 다수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0년 3·1만세 사건으로 체포된 안옥자(맨 오른쪽)
1920년 3·1만세 사건으로 체포된 안옥자(맨 오른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의지는 꺾이지 않아, 1920년 3월 1일 배화학당의 두 학생이 주도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고등과 김경화와 보통과 이수희로, 이수희는 차미리사 사감의 조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만세를 외치자 순식간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운동에 가담한 학생 중 24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됐으나 이들은 포박을 당한 상태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이후 징역 1년과 집행유예 3년,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2년 등의 선고를 받았다. 또한 스미스 당시 배화학당 교장은 교장직을 내려놓고, 차미리사 선생도 사감직을 내놓고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배화학당에서 분리된 배화고등여학교 역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저항하며 맞섰고,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며 1940년 선교사들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됐다. 교사로 있던 이덕봉과 이만규의 노력으로 여성 독지가 이민천이 춘천·이천·연기·익산 등지에 있는 전답과 대지 등 토지 106만6820㎡(32만1723평)를 기부해 폐교의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1945년 9월 끝내 폐교조치 된다.

이후 폐교의 상처를 딛고 1977년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78년 개교했으며, 1979년 1월 배화여자전문대학으로 승격 개편됐다. 이후 산업기에는 학과 인원을 증원하고 유아교육과‧전통복식과‧생활과학과 등을 신설하며 더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여성 인재를 양성한다.

이처럼 3·1운동에 동참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제에 항거한 두 여대는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여성에 대한 교육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이제 두 대학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다.

숭의여자대학교는 ‘Good to Great Leader’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의, 인성 중심 최고 대학’이라는 비전을 정해 국가산업 발전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과 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다양한 분야의 전문직업인 양성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인문사회계열, 자연과학계열, 예체능계열 3개 계열, 16개 학과 및 전공으로 나뉘어 각 특성에 따른 다양하고 전문화된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또 국가・민족은 물론 최종적으로 인류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정신으로 세계적인 명문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으며 해외대학 편입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배화여자대학교는 문화관광·외식문화·패션문화산업 분야에서 특성화를 추진하고, 산·학·연·관 업무협약을 바탕으로 실무능력을 갖춘 전문인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120년의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전통복식 및 전통조리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는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창업 교육을 통해 재학생 창업 분위기를 조성하고 청년여성의 창업 촉진을 위해 여성가족부‧종로구청과 협업하며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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