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교수
백형찬 교수

지난번 글에서 대학은 자연적으로 발생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중세대학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학생이 교수를 찾아왔으니 교수가 대학의 주인 같기도 하고, 학생이 수업료를 냈으니 학생이 대학의 주인 같기도 하다. ‘누가 대학의 주인이냐?’는 싸움은 지금도 전 세계 대학에서 계속되고 있다. 대학구성원은 제각기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학생은 수업료를 냈으니 주인이라고 한다.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니 주인이라고 한다. 직원은 학교를 지키며 행정 일을 담당하고 있으니 주인이라고 한다. 동문은 졸업생은 영원하므로 주인이라고 한다. 이사회는 대학 경영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으므로 주인이라고 한다. 창학이념에 따라 대학이 설립됐으므로 창학이념이 주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중세대학에서는 누가 주인이었는지 살펴보자.

학생은 학생 조합을 만들어 도시의 주민을 누르고 일단 승리를 쟁취했다. 학생은 ‘또 다른 적’인 교수에게도 대항했다. 교수에 대한 학생의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집단적 수업포기였다. 교수는 학생이 낸 수업료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위협은 효과적이었다. 학생은 자신들이 낸 수업료에 상당한 것을 교수가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학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수에게 이를 지키도록 의무화 했다. 이때 제정된 학칙 내용을 보면 ‘교수는 단 하루라도 허가 없이 휴강해서는 안 된다. 교수가 도시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것을 보증하는 공탁금을 내야 한다. 휴강하거나 정규 강좌에서 5인 이상의 수강생을 확보하지 못하면(이는 강의가 형편없다는 것을 뜻함) 벌금을 부과한다. 종소리가 나면 강의를 시작해야 하고, 마침 종소리가 나면 1분 이내 수업을 끝내야한다. 교재를 갖고 가르칠 때 한 장도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어려운 문제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등이다. 이렇게 교수에게 강력한 규제를 가하기 위해서는 학생단체의 막강한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민단(같은 지역 출신 학생들의 모임)이란 단체와 학생조합장(rector, 렉토)에 의해 통솔되는 조합을 만들었다. 렉토는 지금으로 말하면 학생회장이라 할 수 있다(영국에서는 대학 총장을 뜻함). 당시 렉토는 대학을 이끄는 주요 보직자였다. 이렇게 학생조합장과 국민단은 교수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은 유럽 최초의 대학이었으며, 중세 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학풍을 자랑한 대학이었다. 단연코 볼로냐 대학은 ‘학생의 대학’이었다.

교수도 학생조합과 국민단에 맞서 교수조합을 만들었다. 교수조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험 등의 일정한 자격을 요구했다. 학생은 교수조합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교수가 될 수 없었다. 학생은 어떤 직업에 취직하더라도 학식의 증명으로서 교수자격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수자격증이 학위의 최초 형태가 됐다. 현재 대학원에서 수여하는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는 이 오래된 전통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중세대학의 학위 체제는 현재의 학위 체제와는 많이 달랐다. 원래 학사(學士)는 교수자격을 얻은 사람을 뜻했다. 길드에 비유하면 도제를 마치고 독립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직인이 된 셈이다. 석사나 박사는 모두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그런데 볼로냐 대학에서는 박사학위 명칭인 ‘닥터’를, 파리대학에서는 석사학위 명칭인 ‘마스터’를 주로 사용했다. 사실 중세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어쨌든 학위는 학생이 시험을 통해 스스로 책을 강독해낼 수 있고 토론에서 답변할 수 있을 때 교수가 수여했다. 시험과 학위는 중세 대학 교수가 학생에게 행사했던 절대적 권한이었다. 프랑스 파리 대학은 학문에 뜻을 둔 유럽 학도들의 파라다이스였다. 파리 예찬은 바로 파리 대학 예찬을 뜻했다. 단연코 파리 대학은 ‘교수의 대학’이었다.

학생은 등록금을 갖고 교수에게 힘을 발휘하고, 교수는 시험(학점)과 학위를 갖고 학생에게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오래된 학생과 교수의 힘겨루기는 대학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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