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의 글 이야기] 캥거루와 원자폭탄
[권혁웅의 글 이야기] 캥거루와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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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권혁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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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상륙한 영국인들이 배주머니에 새끼를 넣고 다니며 긴 두 다리로 껑충껑충 뛰는 이상한 동물을 보았다. 저 짐승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원주민들이 캥거루(kangaroo)라고 대답했다. 원주민 말로 ‘나도 모른다’는 뜻인데, 오해한 영국인들이 이것을 그 동물의 이름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자기 땅에 사는 동물 이름도 모르는 자들이며, 영국인들은 무지(無知)마저도 지식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지혜로운 자들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1770년 호주를 처음 찾은 쿡 대령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원주민에게서 이 짐승의 이름을 들은 것은 사실이다. 구구이미티르어는 퀸즐랜드 주 북동부 쿡타운 지역의 원주민 언어다. 이 언어로 ‘gangurru’는 커다란 흑색이나 회색 종 캥거루를 뜻하는 이름이다. 원주민은 올바른 이름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역사는 계몽주의가 흔히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됐음을 가르쳐준다.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이 무지몽매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자신들의 정복이 이들에게 문명개화, 윤리적 교화, 산업화의 혜택을 가져다주었다고 선전한다. 캥거루의 이름을 둘러싼 가짜 이야기가 전 세계에 퍼진 것도 이런 이데올로기 선전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지식에 대한 탐욕도 제국주의가 가진 속성 가운데 하나다. 제국주의는 모든 것을, 심지어 무지마저도 앎의 지평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모든 영토를, 심지어 무가치한 땅마저도 차지하려는 행동의 연장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앎은 공감이나 연민과는 무관한 앎이다. 대상이 되는 이들에 관한 여러 정보가 지식의 일람표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들의 고통이나 슬픔은 그 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일제 731부대는 제국주의가 표방한 앎이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웅변하는 사례다. 인간이 인간을 통나무(마루타)라 부르면서 산 채로 해부하고 얼리고 세균과 독극물을 주입해서 죽였다. 그들이 보기에 피실험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도끼 앞에 놓인 나무에 불과했다. 저 회색 짐승의 이름이 캥거루라고? 너는 네 땅에 사는 짐승의 이름도 모르고 있구나. 나는 너의 무지를 나의 지식으로 삼겠다. 지금부터 저 짐승은 캥거루라 불릴 것인데, 저 이름이 불리는 곳 어디서나 너의 무지가 함께 폭로될 것이다.

제국주의의 광기는 홀로코스트로 나타났으나 그것의 파괴력은 원자폭탄에서 절정에 달했다. 폭탄 하나로 지상의 인간들을 몇 명까지 쓸어버릴 수 있는지 계산하는 자들에게 그 인간들의 슬픔과 사랑과 아픔과 우정이 보였을 리가 없다. 그런 감정은 지상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자면 피해자들에게만 있다. 서경식 선생은 하라 다미키(原民喜)라는 일본인 원폭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한 에세이에서 “홍콩에 입성하는 일본군 이야기를 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환청을 들었다. 중국 부인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적었다. 자신이 가해자 편에 속했으면서도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연설을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북한이나 만주에 떨어질 원자폭탄에 희생될 피해자들의 고통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서, “히로시마에 벌어진 일이 또다시 남의 머리 위에 두 번 세 번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도저히 못 견뎌서”(《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109쪽)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캥거루에서 무지를 읽는 시선과 원자폭탄에서 희생자들의 고통을 읽는 시선은 얼마나 다른가. 이 지극한 슬픔이야말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가장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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