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월구 본지 논설위원 / 강릉원주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여자와 남자는 다를까? 또는 같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겠는가? 정답은 ‘여자와 남자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라고 생각한다. 우선 신체적으로 다르고, 하고 다니는 모양새도 다르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도 성별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같은 건 무엇일까? 우선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는 인간인 동물이라는 것이 같다. 인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생존권, 자유권, 경제권, 사회권 등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진다. 또 성별, 연령, 인종, 장애, 학력, 종교, 소득, 성적지향 등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도 함께 가진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즉 성차(性差)를 보는 관점은 크게 생물학적인 관점과 환경론적 관점이 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은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이 관점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보기까지 했다. 생물학적인 관점의 대표적인 학자는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다. 그는 심지어 여성을 남근이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했으며, 여자는 남근이 있는 남자를 부러워한다고도 했다.

환경론적 관점이란 성차가 생기는 건 여성과 남성이 태어나 자라온 환경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젠더(gender)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젠더란 특정 사회에서 특정한 시점에 여성과 남성이 태어나 자라면서 가정과 학교, 사회로부터 여성과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함으로써 생긴 성 정체성 또는 성차를 말한다. 우리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여성은 ‘여성답게’, 남성은 ‘남성답게’ 사회화됐기 때문에 성별의 차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성차에 관한 환경론적 관점을 지지한다. 386세대인 내가 자란 가정은 아주 민주적이고 평등한 분위기의 가정이었다. ‘계집애’ 소리나 ‘여자애가 왜 그러니?’와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엄마가 과자를 나눠주실 때도 7살 차이나는 맏이 큰오빠나 막내인 나에게 똑같은 양의 과자를 주셨다. 그리고 큰오빠가 과자를 다 먹을 때쯤 “큰오빠와 언니는 나이가 더 많고 체격도 더 크니 더 먹어야 한다”고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작은 오빠와 나에게 설명을 하시곤 큰오빠와 언니에게 과자를 조금 더 주셨다. 

그랬는데 학교를 들어가니 사정이 달랐다. 3학년 때부터 반장 선거를 했는데, ‘남자가 반장, 여자는 부반장’이 마치 규칙처럼 정해져 있었다. 그게 이상했던 나는 ‘여자는 왜 부반장만 해야 되느냐?’며 문제 제기를 했으나 공고한 여남차별의 벽을 깨트릴 수 없었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계속 반장을 하고 남녀공학을 갔다. 단과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자발적으로 단상에 올라가 발표를 했던 여학생이 우리 과에 둘이나 있었음에도 과대표는 조교가 내정한 남학생이 됐다. 학교를 다니며 여자이기 때문에 조신하고 얌전해야 된다는 압박을 그냥 온몸으로 느꼈었던 것 같다. 씩씩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던 나는 어느 사이엔가 남자 리더를 따르는 팔로어가 돼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달라졌을까? 분명히 어느 정도 달라지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성차별과 성불평등은 곳곳에 남아있다. 요즘은 여남공학에서 여학생이라고 반장을 못 하게 하지는 않는다. 예전의 우리처럼 ‘남자는 앞 번호, 여자는 뒤 번호’로 하던 것을 요즘은 한 해는 여자아이들을 앞 번호로 하고, 다음 해에는 남자아이들을 앞 번호로 주는 학교도 있다고 하니 변화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학교는 아주 적고 대부분은 아직도 남학생에게 앞 번호를, 여학생들에게 뒤 번호를 준다. 

며칠 전 한 여학생을 만났다. 지금 다니는 대학에서 과대표를 맡고 있는 그 여학생은 중고교를 다닐 때 활달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잘했는데, 남자애들이 그런 본인을 싫어했다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나대는 여자’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남자는 이래야 돼, 여자는 이래야 돼’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면 어떨까?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수많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차별을 받고 자기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 개인에게도 불행이고,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가 아니겠는가? 이제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 아닌 인간다움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되기를 꿈꿔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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