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진 / 본지 전문위원, 인하대 교수

친일을 규명하고 과거사를 청산한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수립한다는데, 이를 통하여 반성과 새로운 화해를 목표로 삼는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선조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하여 두가지 신화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들 자신부터 반성하여야 한다. 첫 번째 신화는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전통이나 관습에 안주하고, 역사청산에 소홀하여 왔다는 자기평가 또는 반성이다. 우리가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하여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은 자기비하에 가깝다. 상황도 다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는 과거사를 지나치게 자주 청산하였을런지 모른다. 6?25 동란의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끔찍한 ‘청산’이 있었던가! 그 뒤에도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선조들의 행적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왔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산’이 이루어지고, 우리 나라에 10년 이상된 정당이 거의 없는 것도 전통보다는 청산을 선택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는 진정한 과거사 청산을 반대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정파간 이해관계에 따른 청산이 집권세력의 변천에 따라 새로운 청산을 반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반부패 세미나에서 누군가 물었다. “왜 정권이 바뀔 때마나 부패척결을 내세우는데 아직도 부패가 만연하고 있느냐”고. 해답은 같다--부패척결이든 역사청산이든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입안되었거나 그에 휘둘리는 것을 막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려워 할 것은 의지의 과소가 아니라, 정치의 과잉이다. 두 번째 신화는 역사 속의 선조들을 이제는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또는 기대이다. 신화와는 달리 우리들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역사 속의 인물에게 가혹하기 쉽다. 평가의 시각이 공적과 과오의 한 쪽으로 편중되기 쉽다. 그렇지만 생애에는 공과가 서로 얽혀 있다. 한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려워도 그 사람의 전 생애, 즉 그 사람이 아예 없었더라면 그 당시 민중의 삶이 덜 고단했을까 여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사적인 경험을 예로 드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나의 외조부는 1909년 보성전문 법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듬해 한일합방이 되어 낙향하였고, 34년 동안 불법 통치에 저항하며 형무소를 들락거리시다가, 결국 해방 직전 해인 1944년 서대전형무소에서 옥사하셨다. 법학도로서 불우한 생애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굳이 과오를 캐자면 어렵지 않다. 형무소로부터 외조부가 위독하다는 전화 연락을 받은 사람은 일본 고베여상의 유학을 마치고 일제 말기의 공제조합에 근무하던 당시 19세의 어머니였다. 적어도 딸이 일본에 유학하고, 공제조합에 취업하는 것을 외조부는 묵인하셨던 셈이다. 가족, 친지들과 함께 형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외조부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고, 그 상태를 살펴 본 친지들은 외조부가 독살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식민당국의 불법통치에 항거하면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외조부를 일제가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 독살이었다는 추론이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적에 외조부가 국내의 ‘준법투쟁가’보다 만주의 독립투사였기를 바랬다. 지금은 어린 시절 나의 요구가 가혹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시기를 살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비겁일 뿐이다. 설혹 외조부가 34년의 소극적 저항과정에서 딸의 유학이나 취업을 묵인하였다 하더라도, 조선학생대표로 의연히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논하고 천황과 총독부에 불법통치에 항의하던 외조부의 전 생애를 두고 함께 평가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민청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친구들이 외교상의 국익을 내세운 유신정부의 회유에 협조하여 위증하였다고 고백하였을 때, 비난은커녕 오히려 안쓰럽고 돕지 못한 나를 부끄러워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이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을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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