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국 경희사이버대 관광레저항공경영학과 교수

오키나와 해안 지형 만좌모.
오키나와 해안 지형 만좌모.

고려와 오키나와 : 류큐왕국과 삼별초!
제주에서 해류를 타고 780~800㎞ 남쪽으로 내려가면 필연적으로 타이완 아니면 오키나와 군도에 도달한다. 류큐(琉球)왕국이라고 불리는 이 해상왕국은 400여 년간 번영을 누렸다.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은 이 섬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고려 말 최씨 무신정권 시대 특수부대인 삼별초는 강화가 함락당하고 패퇴한 진도 용장산성의 항몽 근거지마저 함락당하자 제주도 항파두리로 퇴각해 마지막 항전을 펼쳤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몽골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여기서 삼별초의 공식기록은 마감하지만, 그 마지막 항전자들이 최후로 선택한 곳이 바로 류큐 왕국(Ryukyu, 琉球王國)이었다. 당시 12세기 오키나와는 수렵과 채취 시대로 부족국가를 형성할 만한 수준이 되지 않아서 우수한 병기와 선진문물을 가지고 진입한 삼별초 군인들에 단번에 제압당했고, 13세기부터 구스쿠(Gusuku 御城)라는 이전에 없던 큰 성을 쌓고 초기 국가체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와 고려, 조선과의 문화적 관계성에 주목해 연구를 시작한 분야는 한국의 사학자들이었다.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류큐 왕국의 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지표조사를 하던 중, 고대 초기왕궁과 성터(우라소에 성(浦添城)과 우라소에 요도레)에서 고려와 관련된 기와와 와편들이 발견됐다. 처음에는 이 유적들이 오키나와에 유입된 도래인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우기다가 한국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수막새 기와가 발견되고 그 재료가 오키나와의 토양이라는 것이 발견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숨기고 ‘구스쿠 유적 및 류큐 왕국 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는 했지만, 오키나와 학자들 사이에서는 류큐 왕국과 고려 그리고 조선과의 문화적 연계성을 인정하고 있다.

오키나와 우라소에 구스쿠 유적 고려와편.
오키나와 우라소에 구스쿠 유적 고려와편.

조선과 오키나와 : 율도국의 홍길동
허균의 홍길동전의 내용을 허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역사상 실존 인물과 의적의 활동을 접목해 소설로 구성한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石垣島)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長田大主: 홍길동의 처남) 족보에 홍길동이 1443년(세종 25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홍길동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아치실)에는 시누대로 둘러싸인 생가 터가 그대로 남아있고, 사시사철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길동샘' 등 홍길동 관련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전남 장성군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스토리텔링해 홍길동 축제까지 개최하고 있다. 홍길동전 마지막 부분은 그가 조직한 활빈당 무리들이 임금과 담판을 벌이고 조선을 떠나 남쪽의 섬인 율도국을 정벌하고 왕이 돼 이상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 율도국이 조선의 서남해안의 어떤 섬이라는 설도 있지만, 새로운 왕이 됐다는 것은 조선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했고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추측이 더 신빙성이 있다.

1501년 홍길동은 하테루마지마(波照間島)에 정착하면서 ‘홍 가와라(洪家王)’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16세기 오키나와에서 의적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오야케 아카하치(オヤケ赤蜂)’의 별명이 ‘홍 가와라’ 즉 ‘홍씨 성을 가진 왕'이라는 점에서 동일 인물이라는 추정이 그것이다. 현재 오키나와 여러 곳에 ‘홍 가와라'라는 이름으로 홍길동을 기념하는 유적과 기념비가 건립돼 있다. 오키나와현 나하(那覇)에서 남서쪽으로 450㎞ 떨어진 동중국해 동부 해역에 있는 하테루마지마에 있는 ‘홍길동 도래 기념비’(현지에는 탄생 기념비라고 명기됨)와 홍길동의 처남 장전대주의 기념비, 홍길동이 그의 어머니와 이별해 이시가키지마로 진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모자이별 제단' 등이 남아 있다. 그 외 류큐 열도의 홍길동 유적지들이 산재돼 있는데, 마야코지마(宮古島)에도 홍길동이 쌓았다는 성터와 동굴 우물 사당(홍길동 집단이 궁고도의 원주민과 처음으로 교류한 장소)이 있고 상비옥산 유적에는 도래인 주거지로 조선 양식의 초가집이 8채 보존돼 있다. 구메지마(久米島)에는 우강성, 중성, 구지천성, 지나하성 등 홍길동 집단이 축조한 10여 개 성과 함께 이곳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이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오키나와 본섬의 현립도서관에는 홍길동에 관한 각종 문헌자료가 보관·전시되고 있기에 이러한 오키나와 열도를 한민족의 흔적을 찾아가는 새로운 역사탐험 관광상품으로 구성하기에 충분하다.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공원.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공원.

현재, 대한민국과 오키나와 : 문화적 연계성이 있는 남국의 휴양지
한국에서 2시간 30분여의 비행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오키나와는 태평양상에 오키나와 제도, 사키시마 제도, 다이토 제도로 구성된 류큐 열도 162개 섬으로 구성됐으며, 본섬은 남북 약 140㎞이고 제주도보다 약간 큰 2281㎢ 면적으로 인구는 140만여 명이다.

아열대 기후로 일본 본토와 다른 식생구조가 나타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은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지형적 특색은 유라시아 대륙에 연계돼 있다가 분리·융기해 해안 단애와 산호초 해안 및 석회동굴 등이 이국적인 정취와 어우러져 매력적 관광자원으로 개발돼 있다. 인문지리적 특징은 일찍이 역사적 전통을 지닌 독립된 왕국을 형성해 중국, 조선,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통해 그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고 평화적으로 번성했다. 일본에 강제 복속된 후 식민지배적 경제에 빠지게 되면서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최후 격전지로 당시 30만 명의 주민 중 3분의 1이 희생당했으며, 패망한 일본 본토를 대신해 이후 27년간 미군 지배 후 1972년 반환된 후에도 지금까지 미국의 남태평양의 전략적 요충기지로 활용되고 있고, 오키나와 본섬 면적의 20% 이상이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미군 주둔 기지경제에 탈피해 전통산업개발, 어업자원, 관광산업을 활성화해 거듭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민속놀이나 문화가 곳곳에 산재돼 있다. 술이나 제사, 씨름, 줄다리기, 탈춤, 쌀, 의술, 화폐, 도자기 등 다양한 조선시대 문화가 전승돼 오키나와 문화의 한 부분으로 형성돼 있다. 이제 오키나와는 한국의 저가 항공사 취항으로 제주도와 비슷한 항공료와 남국의 이국적 경관, 한국 운전면허증으로 바로 렌터카 픽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진한 문화적 연계성을 느낄 수 있는 가까운 해외 관광지가 되고 있다. 물론 오키나와 섬 남부 마부니 언덕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20만 명의 이름을 새긴 가증스러운 검은색 위령비가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공원 한쪽에는 남의 나라 전쟁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을 위한 ‘한국인 위령탑’이 애절하게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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