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국 경희사이버대 관광레저항공경영학과 교수

호치민, 노트르담 성당 야경.
호치민, 노트르담 성당 야경.

랜드마크(Land Mark)와 관광

랜드마크(Land Mark)는 말 그대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마크(건물, 조형물)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그래서 낯선 여행지를 제일 먼저 발 디딜 때 ‘그 지역에 왔구나!’ 하는 ‘장소감(Sense of place)’을 느끼기 위해 지역의 랜드마크를 찾아가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반드시 에펠탑을 찾고,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먼저 용두암과 한라산을 보면 ‘제주도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장소감이다. 어떤 국가를 여행할 때 제일 먼저 그 나라의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은 그곳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 그 나라의 자연환경과 인간 상호작용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누적돼 온 역사성, 지역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남부의 호찌민 시는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100여 년 가까운 시간을 식민지 상태로 있었다. 현재 호찌민의 랜드마크는 거의 대부분 식민도시의 역사 유산들이다. 베트남 국민들은 피식민지 국가로서 국가 주권을 상실한 것은 잊고 싶은 역사이지만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였다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또한 당시 프랑스 식민도시였던 사이공 건설과정에서 파리와 같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과 그 결과물을 폐기하지 않고 그 가치를 인정해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 유적 관광자원으로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 국가’가 됐다. 그 식민지 역사가 고통의 시간이었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같은 인식을 하지만 피식민국가 상태에서 해방된 후 식민 유산의 처리에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한국은 식민역사의 단절 및 차단을 통해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매년 3월 1일과 8월 15일이 되면 일본에 저항했던 독립투사와 그 항쟁의 역사를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로 강조하고 있다. 반면, 베트남은 프랑스군에게 처음 사이공을 점령당했던 1858년부터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냈던 1979년까지 약 130여 년 동안 프랑스, 일본, 영국, 미국, 중국 등 초강대국들과 싸워서 이긴 초유의 국가라는 사실이 오늘의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존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족성을 형성하게 됐다. 과거 식민지 시대 건축물들을 시내의 가장 번화가인 1군에 그대로 존속시키는 정도를 넘어, 시청·우체국과 같은 관공서와 노트르담 성당의 종교시설, 오페라하우스의 공연시설 그리고 콘티넨털 호텔 등 현 도시에서 필요로 한 건축물이 식민시대 당시처럼 현재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유연하고 기민한 사고방식의 현재의 베트남인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배에서 체득한 외세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베트남 국민성을 잘 모르고, 베트남의 1억 소비인구와 낮은 인건비만을 보고 한국의 사업가들이 베트남 진출을 쉽게 생각하고 들어왔다가 결국 낭패를 보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호찌민(Ho Chi Minh)시

프랑스 식민지 지배자들은 사이공강가에 제일 먼저 상륙하면서 그들의 신께 경배하기 위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같은 의미의 성모마리아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Cathedral Basilica of Saigon, 1880)을 축조했다. 본국과 연락하기 위해 노란색의 우체국, 귀족과 상류층들이 묵기 위한 콘티넨털 호텔 그리고 예술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해 식민지 지배자의 럭셔리한 공간을 사이공에 구축했다.

노트르담 성당과 성모마리아상.
노트르담 성당과 성모마리아상.

현재의 호찌민시는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정비됐으며, 총면적 2029㎢로 서울 면적의 3배에 해당하는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다. 해발 10m 내외의 낮은 고도의 평원지역으로서 동쪽에 사이공강이 흐른다. 호치민시는 12개의 도시지역구와 6개의 농촌지역구로 나뉘는데 특히 구 사이공 지역은 월남전 당시 미군장교클럽이 있던 렉스 호텔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이고, 촐롱 지역은 차이나타운으로 부()가 집중된 곳, 탄빈 지역은 사이공 북부의 외곽지역, 구찌 지역은 사이공의 북서쪽 외곽지역으로 땅굴과 카오타이교의 본산으로 유명하다.

노트르담 성당(Notre Dame Cathedral, 1877)

프랑스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노트르담 대성당은 1877년 10월 7일, 교황 이시도레 컬럼버트(Isidore Colombert)가 초석을 놓았다.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빛바랜 적색벽돌 끝으로 2개의 첨탑이 나란히 뻗어있는데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80년 4월 11일 부활절에 완공됐다. 성당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재들은 프랑스에서 수입됐는데 대성당의 바깥 벽은 프랑스 남부도시 툴루즈(Toulouse)에서 온 벽돌로 지어졌다. 바로 옆에 위치한 노란색의 중앙우체국과 함께 호찌민시를 찾는 관광객들이 제일 먼저 찾는 랜드마크다.

사이공 중앙우체국 (Saigon Central Post Office)

사이공 중앙우체국은 188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1년에 완공됐다는 역사성이 우체국 전면에 새겨져 있는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이고 현재도 우체국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마리 알프레드 풀루(Marie-Alfred Foulhoux, 1840~1892)에 의해 설계된 이 건물은 고딕 양식, 르네상스 식, 프랑스풍의 영향이 섞여 있으며 외관에서 인테리어 장식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식민지풍의 프랑스식 특징을 지닌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내부에 들어서면 식민시대에 온 듯이 그 시대의 모습을 느낄수 있으며, 벽면의 두 개의 대형 지도는 식민지 초창기의 베트남 주변의 지리적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사이공 중앙우체국
사이공 중앙우체국

콘티넨털 호텔(Hotel Continental) 과 동코이(Dong Khoi) 거리

1892년 콘티넨털 호텔 전경
1892년 콘티넨털 호텔 전경

컨티넨털 호텔은 파리에 있던 ‘Hôtel Continental’의 이름을 딴 호텔로 호치민시 중심부에 있으며 ‘사이공 오페라하우스’의 옆 동코이 거리에 1880년 지여졌다.

식민 시기부터 사이공의 도로명은 숫자로 명명해 왔는데 그것은 철저히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사이공강의 강둑에서 시작된 도로명은 동코이 거리를 ‘6번가’라고 하게 됐다. 새로운 대륙을 찾아 오랜 기간 동안 크루즈 여행을 하는 프랑스 여행객들을 위해 프랑스 스타일의 고급스러운 숙박 시설을 제공할 목적으로 모든 자재를 프랑스에서 수입해 2년에 걸쳐 완공했다. 베트남 전쟁 중에는 언론인, 군속, 정치인, 비즈니스맨 등이 이곳에 모여 당시의 정치와 비즈니스 및 시사 문제 등에 대한 담론을 나누던 장소였고 뉴스위크와 타임지의 사이공 지사가 호텔 2층에 있었다. 통일 이후 호텔 본래의 외양과 스타일은 유지하면서 수십 년 동안 유지 보수해 현재까지 호텔로 사용되고 있으며 현재는 베트남 국영기업인 ‘Saigong Tourist’의 소유로 돼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동코이 거리는 일본인들의 상권이 형성돼 있다.

현재 콘티넨털 호텔 야경.
현재 콘티넨털 호텔 야경.

사이공 오페라 하우스(Municipal Theatre, Ho Chi Minh City)

사이공 오페라 하우스(Saigon Opera House)는 대표적인 프랑스 식민지 건축물로 1900년 1월 1일에 완공됐다. 극장은 1901년부터 1911년까지 이어진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Hanoi Opera House)’의 축소판이라 평가되는데 파리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 또는 Palais Garnie)’와 매우 흡사하다. 건축의 설계, 공사, 감리는 모두 당시의 유명한 프랑스 건축가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 여러 용도로 전용되다가 1975년의 사이공의 함락 후에는 다시 500석 규모의 극장으로서 재건됐다. 1998년 사이공 시 정도(定都) 300년 기념일에 시 정부는 극장 전면부를 개보수해 호치민 시 다용도 극장(The Municipal Theatre of Ho Chi Minh)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이공오페라 하우스
사이공오페라 하우스

호찌민 시 인민위원회 청사 (구 사이공 시청)

식민 시절의 사이공의 시청 건물로서 프랑스식 유럽풍의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본래 파리의 ‘Hôtel de Ville’를 모델로 1902년에서 1908년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호찌민시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건물 정면에서 사이공강까지 이어지는 광장은 한국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역할을 하며, 호찌민의 동상이 있기 때문에 호치민 방문하는 국빈과 관광객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다, 1990년 호찌민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해 ‘소녀와 함께 앉아있는 호 아저씨 동상’을 건립했고, 2015년 7월 베트남의 역동성을 상징하듯 군중을 진두지휘하는 듯한 7.2m 청동 동상으로 바뀌었다.

호치민 동상과 인민위원회 청사
호치민 동상과 인민위원회 청사

전쟁박물관(Exhibition of War Crime)

베트남 전쟁의 아픔과 승리를 동시에 기념하는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장소이다. 과거 미국 정보사가 위치했던 곳으로 식민시기와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군에게서 노획한 탱크, 전투기, 대포 등을 자랑스럽게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 사진과 폴리처상 수상으로 전 세계에 베트남전의 참혹상을 알린 사진, 고엽제 피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사진과 전시품들이 있고, 프랑스 지배시대에 사용되던 단두대와 포로수용소를 원형대로 전시하고 있다.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전쟁 장비들.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전쟁 장비들.

통일 궁(Dinh Thong Nhat)

구 월남 정부 대통령 궁으로 1975년 4월 30일 월남공화국 정부가 항복을 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866년 프랑스 총독 관저로 건축됐으며,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에게 인계되면서 대통령 궁이 됐다. 당시 독립을 기념해 독립 궁((Dinh Doc Lap)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통일 궁(Dhin Thong Nhat)이라고 하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은 각료 회의실과 식당, 2층은 대통령 접견실과 국가 서류실, 3층은 대통령 전용 식당과 극장, 4층은 전용 연회장이 있다. 건물 지하에는 전쟁 당시 종합상황실이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어 당시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명소로 꼽히고 있다.

통일궁.
통일궁.

구찌 터널(Gu Chi Tunnels)

호치민에서 서북쪽 약 75㎞ 떨어진 구찌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치민 함락에 결정적 역할을 한 땅굴이다. 구찌 터널은 프랑스 식민시대인 1940년부터 무기를 감추거나 비밀 통로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구찌 지역 게릴라들이 파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굳고 점성이 강한 흙(마사토)으로 덮여 있어 굴을 파기 위한 자연적 조건이 유리하다. 축조 도구로는 호미와 바구니만을 사용해 지하에 굴을 파서 통풍구를 만들었고, 이 통풍구를 나뭇잎으로 위장하거나 지뢰를 만들어 보호했기에 거의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터널의 크기가 폭 50㎝, 높이 70㎝로 매우 작았기 때문에 몸집이 큰 미군의 출입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게릴라 추적 중에 굴 중간에 머물면 그 공포가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다. 당시 이 굴속에는 회의실, 부엌, 병원, 화장실 등 시설이 있어 최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세계를 구축해 요새화했다. 1967년 이 굴의 존재 여부가 미군에 알려지면서 다양한 직접 추적, 굴 방화 및 폭탄 투하 등이 이어졌으나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패망한 결정적 단초가 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총연장은 250㎞이며 지하 30m까지 3~4층으로 개미굴과 같이 형성돼 있다.

꾸찌터널.
꾸찌터널.

붕따우(Vung Tau)

붕따우는 호찌민에서 차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해변관광지로 사이공강을 따라 배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프랑스 점령 당시 베트남의 관문적인 항구 역할을 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사업가들을 위한 교역중심지 역할을 했다. 붕따우는 총면적 249㎢에 신 붕따우와 구 붕따우 두 지역으로 나뉘며, 붕따우 왼쪽 해안은 프랑스 식민지 때부터 ‘동양의 진주’로 알려졌고 예수상 언덕과 티우 대통령 별장이 붕따우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붕따우 예수상(Giant Jesus)

높이 30m로 1974년 세워진 붕따우 최대의 예수상으로 붕따우 입구의 누이노산(Nui Nho)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커다란 팔을 양옆으로 뻗어 동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전체 붕따우 해변을 조망 할 수 있는 곳이다.

붕따우 예수상.
붕따우 예수상.

티우 별장(Bach Dinh, 화이트 팔래스)

붕따우 시 서북부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1889년 프랑스 총독의 별장으로 사용되던 것을 티우 대통령이 재건축한 후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구엔 반 투 대통령이 사용했다. 프랑스풍 건물로 1층은 박물관으로 17세기 침몰선에서 인양한 도자기 등이 진열돼 있고, 2층은 거실로 소박한 느낌이다. 티우 별장의 정원에는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전쟁 장비가 그 시절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붕타우 해안 경관은 최고의 절경이다.

티우 별장.
티우 별장.

무이네(Mui Ne)

무이네(베트남어: Mũi Né)는 호찌민시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가량 떨어져 있고 판티엣(PhanThiet)에서 서동쪽으로 24km 정도로 인접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남부지역에서 가장 핫한 해안 휴양지로 초기에는 주로 서양 배낭 여행객과 러시아 관광객들만 찾는 곳이었으나 따뜻한 기후, 아름다운 비치, 붉은색과 하얀색의 해안 모래사구(Sand Dune)를 갖고 있는 베트남의 하와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며, 어떤 사진작가들도 이곳에서 와서 실패를 경험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무이네, 피싱빌리지
무이네, 피싱빌리지

파도가 거칠고 높아서 다양한 서핑을 하거나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리기’ 휴식을 취하기에 최고의 장소이다. 아침 일찍 열리는 자연적 항구의 '피싱 빌리지(Fishing Village)'에서는 둥근 바구니처럼 생긴 전통 배 '퉁'과 밤새 잡은 생선을 거래하는 어시장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새우, 조개, 랍스터 등을 굽거나 삶아서 먹을 수 있는 간이식당이 운영돼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체험을 주는 곳이다.

무이네에서 남쪽으로 광활하게 수만 년전부터 형성되어 온 ‘레드 샌드 듄(Sand Dune)’과 ‘화이트 샌드 듄’에서 사막을 체험 할 수 있으며, 일출과 일몰시에는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무이네 바닷가 계곡 안쪽에 있는 요정의 샘(Fairy Stream)은 하얀색과 붉은 색의 모래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계곡을 형성해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무이네, 요정의 샘.
무이네, 요정의 샘.

달랏(Da Lat)시

달랏시는 호찌민에서 300㎞ 떨어져 있는 베트남의 람동 성(Lâm Đồng)의 성도로 람비엔(Lâm Viên)고원의 해발 1500m 고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넓이는 393.29㎢이며 인구는 약 30만명으로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도시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코친차이나 영토에 거주하던 많은 프랑스인들이 낯선 열대기후와 이국 생활에서 오는 질병을 치료하고 휴양하고자 프랑스의 기후와 비슷한 지역을 찾아 나서다 발견해 만들어진 휴양도시다. 이곳은 베트남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최고의 신혼 여행지이지만, 한국에는 늦게 알려진 곳이다. 골프 마니아들이 연평균 24도(최하 15도∼최고 29도)의 최적 골프 휴양지인 이곳을 찾아내 한국인들이 여름과 겨울철에 주로 방문하는 지역이다.

달랏 기차역.
달랏 기차역.
1922년 개장한 팔레스 골프클럽.
1922년 개장한 팔레스 골프클럽.

베트남 에필로그

베트남은 한국과 대리전쟁이라는 불편한 관계로 인연이 시작되었지만, 한국과의 유교 문화적 유대와 함께 국제결혼 그리고 한국 대기업의 동남아 생산기지 역할로 베트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져 한국민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베트남인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현재의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유산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유산까지도 외세항전에 대한 재현을 통해 자국민들에게 전쟁의 승리와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긍정적인 다크투어리즘의 새로운 개념으로 동남아시아의 맹주로 다시 거듭나고 있다. 베트남 북부에서 남부까지 긴 국토에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인문 및 자연적 관광자원은 베트남 관광의 하수분(河水盆)이 되어 지속적인 성장이 될 것이다. 단,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우려 하는 ‘단기간에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민한 성격’만 고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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