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교수

캘리포니아대학 총장이었던 클라크 커어(Clark Kerr)는 《대학의 사명》에서 멀티버시티(Multiversity)라는 용어를 사용해 현대 대학의 특징을 설명했다. 멀티버시티는 학생과 교수로만 이루어진 중세대학의 단일공동체와는 달리 여러 개의 작은 사회가 모인 복합공동체를 뜻한다. 즉 학부와 대학원이 있고, 학부는 학문 분야별로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러한 교육조직 외에 대학본부와 부설기관 및 부속기관이 있다. 그리고 대학구성원도 교수와 학생뿐만 아니라 직원, 조교, 이사회, 동문 등 다양하다. 또한 캠퍼스도 행정동, 강의동, 실험실습동, 부속병원, 부속공장, 부속농장 등으로 대형화됐으며, 학내 시설도 식당, 카페, 은행, 우체국, 서점, 영화관, 쇼핑센터, 편의점 등으로 마치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한다. 현대의 대학은 전통적인 옥스퍼드대나 베를린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대학이다.

이런 멀티버시티의 총장은 역할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C. 커어는 “총장은 다중인격을 지니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학 총장은 학생에게는 친구이며, 교수에게는 동료이고, 졸업생에게는 ‘쓸 만한 친구’이고, 이사들에게는 건전한 경영자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탁월한 연설가이고, 재단이나 정부 관계기관에 대해서는 기민한 교섭자이며, 주의회에 대해서는 정치가이고, 산업계‧노동계‧농민에게는 친구이며, 기부자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외교관이 되고, 일반적인 교육이라면 무엇이든지 알고 있으며, 직업훈련(특히 법률학‧의학)을 지지하고, 신문 기자에게는 대변인이며, 자기의 연구 분야에서는 훌륭한 학자이며, 그 주에서나 국가적인 입장에서는 공복이며, 오페라이건 축구시합이건 똑같이 박수를 보낼 줄 알고, 훌륭한 인격자이며, 좋은 남편이며 아버지이고, 열성적인 교회의 일원이 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행기 여행이나, 공석상에서의 식사나, 의식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해야 할 것이다.”(클라크 커어, 이철주 역 《대학의 사명》, 을유문화사,1991)

시카고대학 총장을 지낸 로버트 허친스(Robert M. Hutchins)는 총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적 역량이라고 했다. 대학은 지향하고자 하는 비전과 목표가 명확해야 하고 총장은 이러한 비전을 대학구성원에게 바르게 인식시키고 구현해야 한다. 그래서 총장에게는 용기와 불굴의 정신 그리고 정의감과 신중함과 같은 위대한 덕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모습의 총장을 교육전문가들은 영웅, 개척자, 거인으로 비유했다.

그런데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거인 총장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대학 운영에서 구성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협의해야 하는 경영적 리더십을 가진 총장 시대가 온 것이다. 세계 최고 대학에는 최고의 자격을 갖춘 총장이 있기 마련이다. 하버드대 예전 총장이었던 데릭 커티스 복(Derek Curtis Bok)이 이에 해당한다. D. 복 총장이 취임할 당시 하버드의 위상은 예일, 프린스턴과 비슷했다. 그러나 단기간 내에 격차를 벌려 놓아 이들 대학이 따라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C. 커어는 대학 총장이 지녀야 할 자질로 판단력, 용기, 인내심을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심이라고 했다. 왜 인내심이라고 했을까? 이는 끊임없는 인내심을 갖고 대학구성원과 대화하고 이해시키고 해결해야 하는 요구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거인 총장 시대가 있었다. 서울대의 최규동 총장, 최규남 총장, 연세대의 백낙준 총장, 고려대의 유진오 총장, 김상협 총장, 이화여대의 김활란 총장이 거인 총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업가형(CEO) 총장 시대도 있었다. 연세대의 송자 총장, 고려대의 어윤대 총장, 숙명여대의 이경숙 총장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제 대학은 초연결, 초지능, 초현실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했다. 이제 첨단 시대의 총장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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