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순 서울대 교수 울분 연구팀 발표

[한국대학신문 신지원 기자] 국내 울분 수준에 대해 최근 진행된 조사들을 종합한 결과, 젊은층, 저소득층, 1인 가구일수록 울분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자신의 아픈 경험이나 성실한 노력을 주위에서 인정하지 않는 ‘무효화’의 경험이 많거나, ‘세상 모두가 각자 누릴 자격이 되는 만큼 누린다’는 공정세계에 대한 믿음이 떨어질수록 울분이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울분장애’의 척도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마이클 린든 독일 사리테 대학·정신의학 교수가 서울대 3개 연구소 연합 ‘사보행’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보건환경연구소, 행복연구센터) 초청으로 방한, 학술행사들이 열리는 가운데,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최근 실시된 8가지 국내 울분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종합한 연구보고를 11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발표했다.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울분 수준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2019년 조사 3건, 2018년 조사 2건의 총 5개 조사를 종합했을 때(N=7,668명), PTED 점수가 1.51로 집계됐다. 울분 상태가 ‘심각한’수준 (2.5 이상)인 응답자가 10.7%, ‘지속적으로’울분을 느끼는 사람(1.6-2.5)이 32.8%에 달했다. 각 1천~2천 명 응답자를 대상으로 한 5개 연구에서 울분을 만성적으로 느끼는 요주의 인구가 43.5%나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울분을 느끼게 하는 경험·상황은 구체적으로, ‘감정에 상처를 주는’,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일’이 다수의 울분 조사에서 상위 5위 안에 일관되게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의, 불공정에 대한 울분은 독일 등 해외 조사에서는 상위에 들지 않았던 항목이어서 눈길을 끈다.

또, 울분을 일으키는 한국 사회·정치사회 사안으로는 개인·기업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 직장·학교 등 가까운 일상에서 벌어진 차별과 따돌림, 공권력 남용, 안전관리 부실로 인한 참사 등이 두드러졌다. 이들 16개 사안에 대한 응답에 반영된 공통 요소를 요인 분석을 통해 추출한 결과, ‘규칙 위반’과 ‘부당한 힘의 사용’이 한국인의 울분을 가장 자극하는 요소로 확인됐다.

울분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연령, 소득, 근로시간(정규직) 등 인구사회학적 요소와, 경제력, 가족 형태 등이 확인됐다. 젊은층이, 저소득층이, 주당 근로시간이 짧을수록 울분 수준이 높았고 1인 가구를 필두로 가족 성원이 많아질수록 울분 경험 정도는 약해졌다.

이 밖에 ‘공정세계신념’이 약할수록, 사회가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울분이 높아지는 경향성이 확인되었다. ‘사람은 저마다 노력의 정도와 자격을 갖춘 만큼 대우를 받으므로 세상은 공정하고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는 공정세계 신념은 검그동안 사회적 거절(social rejection)과 부당함(injustice)이 일으키는 울분의 발생 기제에서 중요하게 다뤄온 요인이지만 실증적으로 확인된 것은 국내 연구에서 처음이다. 이번 분석에 포함된 3개 데이터에서 공통적으로 이 믿음이 약할수록 울분이 높은 것이 확인됐고, 기타 변수들의 영향을 비교한 분석에서도 중요 요인으로 영향력을 드러냈다.

이번 연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울분이 높아짐에 따라 어떤 영향이 개인의 삶에 나타나는가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는 점이다. 발표 자료에 따르면 울분이 높은 집단일수록, 혐오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고, 삶의 만족도와 주관적 행복도는 낮았다. 울분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의 환경을 잘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은 떨어지지만 정치효능감은 높았으며 시위 등 정치참여 의지도 높았고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도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 실시중인 정책에 대한 지지도는 낮았고 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 낮았다.

정신과적으로 이들 고울분집단은 정신 상담이나 서비스 이용의 상대적 빈도가 울분 수준이 낮은 집단보다 잦았고 자살생각이나 시도, 우울감 등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번 발표에서는 일반 인구집단 뿐 아니라 가습기살균제 노출피해자, 노숙자, 서울시 노인 등 특정 집단에 대한 울분 조사 결과도 재인용되거나 재분석되어 보고됐다. 이번 분석에 인용된 한국역학회의 가습기살균제 노출피해자 연구 등을 살펴보면, 이들의 울분 점수가 2.03으로 가장 높았고 노숙자(1.74), 서울시 노인층(1.04)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일반 집단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울분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 확인됐지만 노숙인이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울분 정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명순 교수는 “울분은 독일 등 해외에서 임상연구로 출발했고 주로 외상후울분장애 같은 정신병리로 다뤄지고 있지만 이 감정이 사회건강의 문제로 보다 적절히 다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최근 활발해지는 국내 연구를 통해 점차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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