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호 기자

[한국대학신문 박대호 기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 특정 대입전형에 대해 ‘불공정’ 프레임을 씌우는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22일 예산안 시정연설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들이 교육에서의 불공정에 가장 가슴 아파한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이어 최근 시작한 학생부종합전형 전면 실태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고교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멈췄더라면 괜찮았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한 때는 국가가 나서 학생부를 기반으로 한 대입전형을 늘리라며 대학들의 등을 떠밀다가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꿔 정시를 늘리라고 했던 전례는 잠시 기억에서 지워두자. 여기에 매년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을 통해 대입전형 운영과 설계를 평가하더니만 이제 와서 실태조사를 하겠다니 의뭉스럽지만, 이것도 눈 감고 모른 척 해 보자. 어차피 13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학생부종합전형 실태조사 자체는 이미 시작된 일. 엄정하게 추진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에 어깃장을 놓을 이유가 없다. 

고교서열화 해소도 마찬가지다.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운영성과 평가라는 제도가 엄연히 있음에도 법을 뜯어고쳐 일반고로 일괄전환을 하겠다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수 학생들이 모인 고교를 없앤다면서 정작 일반고나 공교육 강화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을 내놓지 못한 탓에 하향평준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그렇기는 해도 대통령이 나서 고교서열화를 해소한다는 선언 자체는 해봄직 했다.

하지만 구화지문(口禍之門). 입이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라는 옛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도 마련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이어진 연설은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뜨악’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교육에서의 불공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정시 비중을 상향한다는 것은 곧 수시가 그만큼 불공정하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실태조사를 벌이는 학생부종합전형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대통령이 나서 국민들에게 직접 천명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대통령의 발언은 아마 ‘여론’을 의식한 것이었을 터다. 조 전 법무부장관 후보자 검증 과정에서 자녀 입시 의혹이 크게 불거지고, 그로 인해 대통령이 “대입제도 전반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이 불과 50여 일 전의 일이다. 이후 공개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정시모집을 바람직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63.2%로 수시모집의 22.5%를 크게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 내년 4월이면 총선이 기다리는 상황. 야당이 정시모집을 50%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을 당론으로 삼고, 60% 이상 정시선발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공세를 펼치는데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대통령이라면 자신의 발언이 가질 파급력을 생각하고 신중을 기했어야 한다. 타당성이야 어쨌든 공론화를 거쳐 2022학년 대입부터 정시모집을 30% 이상 확대하라는 권고안이 나온 것이 불과 1년 하고도 두 달 전의 일이다. 2022학년 입시를 치를 학생들은 아직 고1에 불과하다. 바뀐 개편안이 채 적용도 되기 전에 또다시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 입장 표명이 불가피했으면 실태조사를 마치고 했어도 될 일이다.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학생부종합전형이 불공정하니 정시모집을 늘리겠다고 하는 것은 결과야 어떻든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답정너’나 마찬가지다. 

지식중심에서 역량중심으로 세계 교육 트렌드가 이미 달라졌다는 점, 그에 따라 객관식 선다형 시험이 아니라 논·서술형 시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더 이상 말해야 입만 아프다. 정시모집을 늘리겠다며 수능의 영향력을 키우면, 당장 현 정부의 교육정책 중 하나인 고교학점제는 무너질 것이며, 2015 개정 교육과정 취지를 살리기도 어렵다는 문제를 정부가 모를 리 없다. 

공교롭게도 대통령 발언 이틀 뒤 열린 ‘한-OECD 국제교육 콘퍼런스’에 참가한 안드레아스 슐라이허 교육국장은 “한국은 입시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를 내놨다. 대통령까지 동참한 ‘수시-정시’ 논란 속에 교육적 가치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여론의 힘겨루기만 남은 현실 속에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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