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일 전 한신대 총장(경동교회 담임목사)

채수일 전 한신대 총장
채수일 전 한신대 총장

인류의 역사에서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서양 중세에 있었던 흑사병은 유럽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놀라운 속도와 광범위한 확산으로 세계 경제에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세계적 대유행은 21세기의 인류에게 재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백신 개발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감염병을 극복해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도 시간이 가면서 언젠가는 진정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발생원인과 확산과정, 변종의 조건 등이 아직 완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바이러스 재난은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우리 욕망을 채우려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하고, 수탈한 결과임은 분명하다. 기후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번 바이러스 사태도 우리 인간 자신이 자초한 인재(人災)인 것이다.

세계에는 국경이 있지만, 바이러스에게는 국경이 없다. 바이러스는 사람의 나이도, 성도, 계급도, 인종도, 국가도 가리지 않는다. 인류는 이제 모두 함께 죽든지 아니면 함께 살든지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빌 게이츠도 ‘코로나 바이러스 19’를 거대한 재앙이 아니라 위대한 교정자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잊고 살아온 중요한 교훈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것이 주어졌고, 그것들을 배울지 말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이 시간이 종말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며, 이 시간이 성찰과 이해를 통해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배울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회로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기이자 기회라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로부터 무엇인가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같은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인류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이 기회에 인류가 성숙하게 변화한다면, 언젠가 우리가 이 코로나 시대를 은혜의 시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목숨을 걸고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달려가는 의료진들, 자기는 살 만큼 살았으니 젊은이에게 산소 호흡기를 주라고 하고 세상을 떠난 할머니, 자기 몫의 마스크를 사지 않고 더 어려운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시민, 헌혈하고 성금을 모아 보내고, 해외에서 귀국하는 국민에게 기꺼이 자가격리 공간을 제공한 시민들, 시도 경계를 넘어 환자들을 받아 치료하는 자치단체들, 임대료를 깎아주는 집주인들, 영세 상인들을 돕기 위해 착한 소비에 나선 시민들, 이름 없는 이들이 모두 진정한 영웅이다.

이런 시민들의 헌신과 연대야말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표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서로에게 힘과 격려를 주는 이름 없는 시민들의 이야기들은 우리 가슴을 자부심과 감동으로 채운다. 지금 세계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재기, 각자도생, 다시 강화되는 인종주의, 국경폐쇄, 자국중심주의 현상과 비교하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극복해가는 우리나라가 세계로부터 신뢰받는 모범국가, 우리 국민이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시민이 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표징들을 보고서도 감동은커녕, 위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언론들과 정치인들, 집단 지성으로 재난을 극복하지 않고 집단 광기를 부추기는 일부 기독교 집단들, 위기를 돈벌이의 기회로 생각하고 사재기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코로나 시대’의 표징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재앙의 시대적 표징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재앙은 ‘은혜의 표징’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가 거리를 두고 사람과 사물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던 우리 자신과 이웃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과 역사도 거리를 두고 보게 됐기 때문이다.

‘잠시 멈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잠시 멈춰 우리가 걸어온 뒤를 돌아보게 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지구적 규모의 약탈적 자본주의의 발전 패러다임이 지속가능한지 숙고하는 기회로 삼게 했으니 은혜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개인의 생명이 우주적 ‘온생명’과 직결돼 있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생태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줬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지금까지 인류를 분리해온 모든 보이는 장벽,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계급적, 남녀노소의 장벽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이제 인류는 힘과 지혜를 모아 사랑과 연대로 함께 살든지, 아니면 함께 죽든지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와 거기에서 파생된 경제 위기가 글로벌 위기인 것처럼, 인류의 대응도 글로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분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연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위기는 장기화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 큰 재앙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로벌 연대를 택한다면,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승리가 될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모든 전염병을 상대로 한 승리가 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19’ 재난은 분명히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더 크고 깊은 위기로 갈지, 아니면 인류를 새로운 깨달음과 공생의 기회로 이끌지는 전적으로 인류의 학습능력에 달려 있다.

채수일 전 총장은...
1974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한신대 신학과 교수로 부임해 신학과장, 신학대학장 등을 거쳐 한신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경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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