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더불어시민당 당선인

이수진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은 "현장과 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현장 중심 의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사진=허지은 기자)
이수진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은 "현장과 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현장 중심 의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사진=허지은 기자)

[한국대학신문 허지은 기자] “후배들에게는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소속감이 주는 안정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많은 직장인들이 조직 내에서 여러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서도 참는 이유는 안정감을 준 ‘소속’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겪는 불합리도 참는 마당에, 타인의 사정에야 눈뜨기 쉬우랴. 그러나 누군가 이 불합리함을 참지 않고 맞서 싸운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기꺼이 평가할 것이다.

더불어시민당 소속으로 21대 국회에 입성하게 된 이수진 당선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간호사로 일하며 간호사뿐 아니라 보건의료인이 누려야 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고, 노동자와 사측의 대립 사이에서 더 나은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이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며, 사회가 노동자를 지켜줄 수 있도록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 나섰다. 노동 취약계층인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법안과 국민의 건강할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의료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급격한 산업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실질적으로 먹고 사는 교육이 계속될 수 있도록 직업전환을 지원하는 직업훈련 지원 법안도 관심있게 추진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이수진 당선인은 삼육보건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연세의료원에 입사했다. ‘자연인 이수진’의 삶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은 연세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부터다. 불합리한 인사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 입성을 앞둔 이수진 당선인을 지난 6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출신에 따른 차별 해결하고 싶어 시작한 노조…‘노동자성’에 눈뜨다 = 상황이 나아진 지금과 달리, 당시 간호계에서는 출신에 따른 차별이 극심했다. 그가 일하던 병원은 그 중에서도 학연에 따른 차별이 극심하기로 이름 높은 곳이었다.

“제가 일하던 곳이 본교생과 타교생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오죽하면 ‘마약을 한 간호사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어요. 3년제 간호학과를 졸업했다고 4년제 대학 출신보다 한 호봉 낮게 시작했어요. 저보다 1년 늦게 들어온 후배에게 인사평가에서 유리한 일을 몰아주느라 부서장에 제게는 일할 기회를 주지 않는 일도 겪었습니다.”

합격을 하고도 마음을 졸여야 했고, 입사 전부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차별의 벽 앞에서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 간호사가 ‘학연’ 하나로 선배인 자신과 동료보다 좋은 인사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을 먼저 맡은 것을 보고 부당하다고 느꼈고, 이로 인해 부서장과 부딪히자 더 부당한 부서 이동을 겪었다.

“저도 저지만, 저와 함께 입사한 동료도 같은 일을 겪는 것을 보고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시기에 맞게 간호사를 훈련시켜야 하는 병원의 입장에서 봐도, 병원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었죠. 문제제기를 하니까 부서장이 저를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 시켰습니다. 저 역시 다른 부서로 가고 싶을 만큼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인사이동 절차에 문제가 있었어요.”

공정하지 않은 인사제도와 평가 방식에 대해 혼자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그는 연세의료원노동조합을 찾아갔다. 처음엔 왜 노조를 찾아갔느냐며 회사 측에서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노조와 함께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자 결국 부서장이 한 발 물러섰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노동자성’에 눈을 뜨게 된다. ‘노동운동가 이수진’의 시작이었다.

“노사협의를 통해 인사제도의 문제점을 주장하면서, 노조의 힘을 알았어요. 노조에서 활동을 하다보니, 노조와 사측의 협약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협약서에 시간 외 수당 지급에 대한 내용처럼 그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쉬는 날 일했던 것이 ‘부당’하다거나 ‘불법’이라는 걸 그 때 안 거죠. 그 때부터 근로기준법, 단체협약 등을 알아보면서 당당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관리자도 더 이상 함부로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첫 목표였던 인사제도 시정은 물론, 노동자들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코칭센터를 세웠다. 390여 명의 연세의료원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도 기여했다. 옳지 않은 일을 옳게 바꿔나가는 사이, 그의 이름 석 자 뒤에 붙는 직함은 간호사에서 연세의료원노동조합위원장이, 그리고 한국노총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 수석부위원장이 됐다.

“저도 노조 활동을 하기 전에는 평범한 시민이었고 대한민국에서 아이 둘 키우는 ‘직장맘’이었어요. 그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고 아파트 평수 넓히고 싶은 그런 사람이요. 그런데 노조에서 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노동자들이 울면서 자신이 겪은 힘든 일을 제게 털어놓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 남을 위해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어요. 돌아보니까, 그 전까지는 남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더라고요. 남을 위해 사는 게 힘들 때도 분명 있지만, 어려움을 함께 나눴던 경험이 굉장히 큰 행복이었어요.”

이수진 당선인에 대해 그의 딸 황윤희씨는 후보 홍보 영상에 출연해 “엄마는 정말 눈물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엄마가 어떤 분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울고 계셨다. 이야기를 하는 분도 울고 있었다. 간호사 분이 근무, 사람들과의 일 때문에 힘들어서 울고 있던 것이었다”며 “엄마가 울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같이 그 사람들 편에 서 투쟁해주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같은 이유로 울어본 사람…노동자들의 눈물 닦는 게 나의 사명” =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있다. 폭력은 지양해야 하지만, 그만큼 법이 멀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생활 속 여러 부당함의 저편에는 충분한 공정함과 기회의 균등을 포함하지 못하는 법의 한계가 있다. 노동운동을 하면 할수록 그에게도 비슷한 생각이 닥쳤다.

“노조 활동을 하면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노사 간 협상을 통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노조를 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기뻤고, 개인이 아닌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어 보람찼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더딘 것도 있었습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던 2011년 12월, 정계로 외연을 확장할 기회가 열린다. 그가 활동하던 한국노총이 민주당과 힘을 합쳐 민주통합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 때 연세의료원노조위원장으로 있던 그는 당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지지 활동을 하고,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정당활동을 했다. 이후 민주통합당 당무위원회 위원,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 더불어민주당 전국노동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맡았다.

노조 일을 하며 주말도 반납했던 상황에서,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그를 가족들은 만류했다. ‘왜 꼭 정치를 해야 하냐’‘다른 사람이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도 했다. 그에게도 정치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현직 노조위원장으로서 정당 활동을 하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반대파의 사실 왜곡으로 자리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당 내에서 노동 활동 세력이 마음껏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노동대표성이 특정 정당뿐 아니라 많은 당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자신의 손을 잡고 억울함을 호소하던 동료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노동 현장을 잘 아는 현장 전문가로서 자신이 국회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장과 노동자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저는 현장 중심 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전 평간호사 출신으로 노조를 했고, 노동자의 권리와 중요성을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현장의 문제를 눈으로 직접 봤고요. 간호사로서의 어려움은 제 선배와 후배, 동료도 겪었고 저 스스로도 겪었죠. 나이트 근무가 얼마나 힘든지 제 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젊은 간호사가 울면서 현장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잘 알아요. 현장의 어려움을 누군가 제게 굳이 설득할 필요 없이,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같은 이유로 많이 울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해결하는 게 제 사명입니다. 그동안은 국회 밖에서 투쟁하고 울었다면, 이제부터는 국회 안에서 더 책임 있게 일할 겁니다. 단체, 기업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법입니다. 제가 힘들었던 부분이 바뀌어서, 후배들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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