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수단에 불과한 돈과 권력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 전도시대에 철학은 강단철학에서 탈피해 현실속에서 문제를 찾고 해답을 모색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윤리적으로 견실한 사회를 가꿔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좀 더 큰 세계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권력에 가까운 자리가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는 갈지(之)자 지식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본지 김우종 주필이 김태길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서울대 명예교수)과 우리시대 철학과 윤리성 회복 등을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 김우종 : 역사변화의 속도와 주기가 빨라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요. 김태길 : 최근의 추세를 ‘세계화’로 특징지을 수 있을 텐데, 세계화는 양면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세계가 하나가 되어 공생과 평화를 이루자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약육강식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강대국 위주라고 볼 수도 있죠. 김우종 :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불리한 위치에 있지 않은가요. 김태길 : 불리한 상황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민족주의에만 얽매여 눈앞의 국가이익만 생각하는 협소함보다는 세계사적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죠. 하지만 국제적 경쟁에서 지게 되면 다 공상에 불과합니다. 결국 실력을 키우면서 변화의 물결에 참여한다는 철학적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김우종 : 그렇지만 세계적 변화에의 참여가 자칫 우리 고유의 정서, 의식구조, 고유문화의 망각과 파괴로 이어질 우려도 있지 않을까요. 김태길 : 세계가 하나가 되어도 각국의 문화전통은 살려야 합니다. 세계가 하나의 문화를 갖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획일화를 낳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역사가 깊고 자랑할 만한 문화도 많이 있습니다. 좋은 문화전통을 가꾸어 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영어 조기교육을 하자는 주장처럼 문화사대주의적 경향도 우려스러운데, 물론 영어도 배워야 하고 세계문화에도 관심을 쏟아야겠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김우종 : 우리의 경우 아무래도 그런 노력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김태길 : 문화적 색채가 비슷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고유문화를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습니다. 반면 오랫동안 중국문화에 예속돼 있던 우리의 경우 문화적 사대주의가 생겼죠. 지금은 국내외적으로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언문’이라 비하하며 중국의 말글을 좇지 않았습니까. 물론 강한 자와 타협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역사적 요인도 클 겁니다. 김우종 : 그런 의미에서 분단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더욱 절실해집니다. 김태길 : 하루 빨리 통일을 이뤄야 하죠. 하지만 정서보다 현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남북 양쪽에게 행복한 결과로 이어지도록 말이죠.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은 남북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관, 언어, 생활감정, 경제생활 등에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갑자기 통일될 때 생기는 부작용을 고려해서라도 이질감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더 활발히 해야 합니다. 김우종 : 요즘 세태를 보면 철학이 없는 사회로 치닫고 있지 않나 우려가 됩니다. 김태길 :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에 ‘가치관 전도’ 현상이 광범위해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덜 가치 있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마치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형상이라고 할까요. 쉽게 말하면 삶의 수단에 불과한 돈과 권력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부인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중성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학문, 예술, 종교, 도덕 같은 정신적, 인간적 분야에 더욱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김우종 :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의 돈과 권리마저 끊임없이 가로채고 독점하려는 욕심이 아닐까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를 보면 무엇을 위해서인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면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려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만나게 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실제로 매우 허망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지요. 김태길 : 인격, 학문, 예술은 ‘내면적 가치’, 돈, 권력, 향락은 ‘외면적 가치’라고 일컫습니다. 외면적 가치를 내면적 가치보다 아래에 두어야 가치론적으로 맞는 것이지요. 그런데 경쟁의 속성이 강한 외면적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경쟁관계에 있으니 서로를 제압해야 할 적으로 보게 되고 협동이 안 된다는 것이죠. 국가나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김우종 : 그러면 가치전도현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김태길 : 전통적으로는 한국사회가 유교사회의 논리를 받아들여 내면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해방이후 우리 국민들이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지 않았습니까. 이 때 미국이라는 물질이 흔한 나라를 겪게 되면서 매료됐던 거죠. 또 군사정권도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까지 내세워 물질적 부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습니다. 이 때 졸부들이 많이 생겼고 ‘돈이 최고’, ‘권력이 최고’라는 졸부의 심리가 나라 전체에 많이 퍼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게 해야 합니다. 김우종 :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긴 했는데 우리가 진정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행복해진 것인지에 대해선 의구심도 생깁니다. 특히 나보다 더 가진 사람에게 언제나 패배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호화아파트에 고급승용차를 타고 아무리 배불러도 여전히 가난한 백성이죠. 김태길 : 행복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음의 평화를 중시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늘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우종 : 지식인 사회에도 물질 만능주의가 침투한 느낌이 듭니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 독재정권 시기의 지식인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할 때 격세지감도 느껴지는데요. 김태길 : 양반계층 전부는 아닐지라도 선비들은 대체로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또 일제시대 지식인들 역시 항상 국권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나를 위해 살기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혼자 최고가 되던지 남을 앞지른다는 생각은 적었죠. 앞장서지는 못했지만 군부독재와 싸울 때에도 교수들은 학생들과 함께였습니다.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이 지나치게 좌경화되면서 틈이 벌어지기도 했지만요. 김우종 : 기성 지식인들과 젊은 지식인인 대학생 사이에 틈이 생겼다면 지식인 사회의 불행일 텐데, 학생들을 꾸짖지 못하고 학문의 세계에만 지나치게 빠져 있었던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김태길 : 그렇습니다. 대체로 교수들이 몸조심 하다가 현실에 안주한 경향이 큽니다.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좀 더 큰 세계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대학교수보다 권력에 가까운 자리가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는 지조없는 행동도 문제이고요. 갈지(之)자 지식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김우종 : 지식인의 사회참여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봅니다. 돈과 권력 획득에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갖는 것, 또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현실문제에 부딪치면서 노력하는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배운 것이 많은 만큼 배운 대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 아닐까요. 김태길 : 지식인으로서의 철학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주석을 달거나 비판을 하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강단철학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초가 없다면 현실문제에 끼어들어도 개똥철학으로 흐르게 되기 쉽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강단철학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지식인들이 현실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발언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철학책 속에서만 해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문제를 찾고 그 현실문제의 해답을 모색하는 철학자들이 나와야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철학계도 점차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김우종 : 선생님께서는 두 길 중 어떤 길을 걸어오셨다고 보시는지요. 김태길 : 저는 철학의 한 분과인 윤리학을 전공했는데 이 학문은 언행일치, 즉 실천을 강조합니다. 처음엔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은 후에 사회적 실천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고자 했던 게 아니라 청년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운동을 위해서는 운동단체를 조직해야 했는데 당시 모든 운동단체는 좌익이 아니면 우익이었습니다. 또 단체운영을 위해서는 상당한 돈도 필요했죠. 결국 많은 시간 고민하다 다른 길을 택하게 됐습니다. 곧 대학사회에 몸을 담게 되고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하니 강단철학을 하게 됐습니다. 김우종 : 지금은 학회와 연구소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김태길 : 정년퇴임 후 <철학과 현실>이라는 잡지를 내고 ‘철학문화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현실 속에서 문제를 찾고 답을 구하는 풍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또 지난해 1월엔 학자들뿐만 아니라 법조인과 문인 등이 참여해 윤리운동을 해보자는 취지로 ‘성숙한 사회가꾸기 모임’이란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윤리적으로 견실한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사회가 결국 무너질 거라 우려했던 것이죠. 처음엔 그런 운동이 잘 되겠느냐며 비웃던 사람들도 지금은 그 필요성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큰 변화입니다. 저는 가능성을 낙관하고 있습니다. 김우종 : 어떤 의미에서 낙관하신다는 말씀이신지요. 김태길 : 한사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회든 그 구성원 모두가 윤리적으로 건전할 수도 없는 법이죠. 하지만 사회가 아무리 혼란해도 모두가 비윤리적이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사회에는 윤리적 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엔 저명인사들도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의 저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지식인들이 그런 사람들을 묶어가면서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된다면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될 테죠. 김우종 : 우리사회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계신데 대학생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일각에서는 철학이 빈곤하고 대중문화에 지나치게 매몰돼 있다고 지적을 하는데요. 김태길 : 아까 학생운동이 좌경화된 데 대해 다소 부정적으로 얘기했지만 저도 한때는 사회주의가 옳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체험을 통해 변하기는 했지만요. 중요한 것은 한때 좌경을 했더라도 일신의 안위, 자기 가정, 또는 사랑놀이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를 고민했다는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자랑스러울 수 있죠. 요즘엔 취직이나 데이트 같은 문제처럼 실용주의에 많이 경도돼 있는 듯해 걱정스럽습니다. 우리 현실에 맞는 젊은 지식인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월드컵 때 서광이 비치기도 했죠. 하나가 되는 모습, 민족의 역량으로 그 에너지가 모아지길 바라는 희망. 하나의 희망에 그치지 않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선 그 희망을 결집해내는 주도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김우종 :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김태길 : 사람마다 인생관이 달라서 ‘이 길만이 옳은 길이다’고 말할 수 없죠. 옳은 길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문학하는 사람들, 그림이나 학문을 하는 사람들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발휘하는 것이 바람직할 테죠. 단일한 행복의 추구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자기 마음 속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자연히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가는 길도 여러 길 중에 하나일 텐데, 삶에 만족하기 위해선 몇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고 봅니다. 건강이나 경제력도 당연히 필요하겠죠. 또 자기실현, 자아성장에 힘쓰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 이바지하고 인화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김우종 : 소박한 꿈을 가지고 계시네요. 김태길 : 건강관리 열심히 해가며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게 어찌 보면 소시민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은 봉사하는 마음이 부족해 보여요. 더욱이 대통령 같은 자리는 봉사직으로 봐야 합니다. 진정한 봉사를 위해서라면 아무나 못 나설 텐데 권력이라는 전리품을 누리는 자리로 변질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 자신부터 그런 의미에서 봉사하는 자세로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김우종 :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랜 시간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리=조양희 기자 사진=한명섭 기자> □ 김태길은 누구인가 김태길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철학의 생활화에 일생을 바친 원로 철학자이자 수필가. 서울대 철학과를 1회로 졸업하고 6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62년부터 86년까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철학회장, 수필문학진흥회장, 도산사상연구회장,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강단에서 물러난 후 계간지 <철학과 현실> 발행인으로 철학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 교수는 우리 사회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 원로들을 중심으로 ‘성숙한 사회가꾸기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자원봉사단체인 볼런티어21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원봉사를 시대의 패션으로’라는 패션쇼를 열고 직접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윤리학> <웃는 갈대> <듀이의 사회철학> <일상속의 철학> 등 다수의 저서와 수필집을 펴냈으며, 현대수필문학대상, 대한민국학술원상, 인촌상(학술부문), 제5회 올해의 자랑스런 서울대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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