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백형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이른 봄이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산은 절벽처럼 가파르게 솟아 있다. 그 산 밑에 작은 집 하나가 있다. 방 안 책상에는 매화 꽃병이 놓여있다. 한 선비가 매화 향기를 맡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마당의 늙은 매화나무에 매화가 만발했다. 한겨울의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린다. 나무는 곧 승천할 용 같다.

이 그림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매화서옥도’라는 작품으로 조희룡이 그렸다. 조희룡은 조선을 통틀어 매화를 가장 즐겨 그린 사람이다. 그가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매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집에는 내가 그린 대형 매화 병풍이 펼쳐져 있다. 벼루는 매화시경연이고 먹은 매화서옥장연을 사용한다. 매화시 백 편도 지을 생각이다. 내가 사는 곳도 매화백영루라 이름 지었다. 차도 매화편차를 마신다.”

자신의 호도 매화에 빠진 늙은이란 뜻의 ‘매수’, 매화로 부처가 되려는 사람이란 뜻의 ‘매화두타’라 했다. 조희룡은 매화나무에 핀 꽃들을 부처님이라 생각해 꽃송이 하나하나를 공양하듯 그렸다. 인장도 매화경, 매화시경이라 새겼다. 이쯤 되면 조희룡은 ‘지독한 매화 매니아(癖)’라 아니 할 수 없다.

매화는 조선의 선비들이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 이유는 매화가 매서운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눈보라 속에서 피어나는 그 모습이 마치 선비를 닮았다. 그래서 매화를 사군자 중에 으뜸으로 쳤다. 또한 매화 그림도 선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유는 선비들이 임포의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임포는 중국 북송 시대 시인으로 고산이라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오직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래서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한다.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산 것이다. 임포의 삶을 그린 것이 바로 매화서옥도다.

조희룡은 여항인으로 문인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여항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란 뜻이다. 조선은 사대부 문학이 주류를 이뤘는데 중인들이 여항문학을 만들었다. 조희룡은 여항문인화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조희룡은 사대부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집안은 대대로 낮은 벼슬을 지냈다. 그래서 그는 사대부 정신을 지녔지만 여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조희룡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창조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예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은 조희룡을 ‘묵장영수’라 했다. 붓과 먹을 다루는 예술세계에서 최고봉이라 극찬한 것이다.

조희룡은 서른한 살에 헌종의 명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왕의 명령을 기록하는 일도 했고, 국가의 사적을 보관 관리하는 장서각에서 사서 일도 했다. 비록 낮은 계급의 관리였지만 헌종의 신임은 두터웠다. 금강산 그림을 그려오라는 헌종의 명에 따라 금강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만폭동 계곡을 건너다가 그만 미끄러져 죽을 뻔했다. 그래서 오래 살려고 구룡연 너른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 넣기도 했다. 헌종은 조희룡의 회갑 날에 책과 벼루를 내려줄 정도로 아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희룡은 예송논쟁에 휘말렸다. 예송논쟁이란 ‘성리학의 예법을 어떻게 푸느냐?’를 두고 벌인 논쟁이다. 조희룡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한쪽 편을 지지하자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조희룡을 김정희 측근으로 보고 전남 신안의 임자도로 유배보냈다. 그의 나이가 예순을 훨씬 넘었을 때였다. 사실 조희룡은 추사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추사는 조희룡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억울하게 유배를 간 것이다. 그러나 그 외로운 임자도에서 조희룡의 예술세계는 더욱 깊어졌다. 그에게는 뜨거운 예술혼이 있었다. 그러기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다.

현재 조희룡의 매화작품은 서른 작품이 조금 넘게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매화서옥도를 보러 가야겠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돼볼 생각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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