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본지 전문위원/충남대 교수

세상에는 있을 수 있는 일과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신생아를 희롱하는 사진을 홈페이지에 버젓이 게재하는 행위나 패륜 범죄 등이 후자에 속하는 경우일 게다. 있을 수 없는 일은 대개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지칭한다. 이에 비해 있을 수 있는 일은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두 가지 경우의 수 모두를 포괄한다. 삼성이 고려대 1백주년 기념관 건립에 4백여억원을 기부했다. 기업이윤의 사회적 환원과 산학협력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있을 수 있을 뿐더러 바람직한 일이다. 이에 고려대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이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4백억원이라는 물질적 기부에 대한 ‘보은’ 차원에서 학위가 ‘거래’되는 풍경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고려대 학생 1백여명이 학위 수여식 저지에 나섰다. ‘무 노조주의’란 희귀한 경영철학,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노동자 감시와 탄압을 일삼는 사람에게 명예로나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이유에서다. 배우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학교의 ‘거룩한’ 행사를 방해하고, ‘국보급’ 명사인 이건희 회장에게 봉변을 씌운 행위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후폭풍’을 몰고 왔지만 대학을 구성하는 어엿한 일 주체로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자 표현할 수 있는 의사이고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학위 수여에 반대한 고려대생들의 행위를 권장할 만큼 바람직한 일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란 말이다. 결국 거액의 기부금에 명예박사 학위로 보답한 학교나 학위 수여식 소동을 야기한 학생들 모두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인 셈이다. 그런데도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만 반성과 성찰을 강요한다. 이례적일 정도로 기민하게 발표한 사과문을 통해 총장은 이번 사태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민주적?폭력적 행위”이기에 앞으로 “바른 교육을 통해 학생이 균형 잡힌 시각과 절제된 행동양식을 갖추도록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이 사과문은 이메일로 삼성에도 전달됐다고 한다. 뭔가 거북하다. 바른 교육을 다짐하는 자세야 훌륭하지만 자기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끌부터 찾아내는 가부장적 태도 때문이다. 물질적 기여에 학위로 보상하고, 명예 학위이기는 하나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 해당 단과대학과의 합의조차 거치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은 왜 고해하지 않는 걸까. 자라나는 학생들의 과실을 감싸주기는커녕 이에 인색하고 대신 자기 허물에 관대해서야 바른 교육이 약발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오히려 대외용일망정 학생들의 행위를 젊은이의 열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오히려 ‘내 부덕의 소치’를 탓한 이건희 회장의 반응이 훨씬 더 교육적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학과 기업의 수준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지 미처 몰랐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