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학교 교수
(해군발전자문위원)

조규택 계명문화대학교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학교 교수

나라와 사회가 혼란스러운데 자신만 호의호식하는 것은 지식인이라 할 수 없다. 사회 정의가 죽었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지식인으로서 마땅히 출세라는 그릇된 길을 걷기보다는 정의와 도의를 세우고자 힘쓰고 애써야 한다.

일찍이 안중근 장군은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친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은 『논어』, 「헌문」편에 자로(子路)와 공자의 대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지만, 우리에겐 안중근 장군의 유묵으로 인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삶은 견리사의하고 견위수명했다. 그는 나라가 위기였을 때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았으며, 가산을 처분해민의 계몽과 교육에 전념했다. 나아가 국권이 위기에 처하자 이토의 15가지 죄악을 물어 척살한 의사(義士)였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이익을 앞에 두고 갈등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는 것부터 무슨 옷을 입을 것인가와 같은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어떤 전공을 공부하고, 무슨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고뇌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소년과 학도들이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려고 자원입대했다. 견위수명한 소년병들과 학도병들이 강토를 지키고 이슬처럼 사라졌다. 이런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의 많은 내용이 견리사의보다 견리사득(見利思得)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까짓 부귀와 영화를 닭벼슬처럼 가벼이 볼 수 있는 지혜로움을 배우고 습득해야 할 텐데, 많은 사람이 작은 이득에 눈이 멀어 일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함정에 빠지고 있다.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혼란하면 결국 그 사회는 망한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사태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인류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악성 전염병(contagion)이 우리를 위축시켰지만, 위기는 기회이기도 했다.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사선으로 뛰어든 헌신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희망이며 자랑이자 견위수명을 실천한 것이다.

망우당 곽재우는 스승인 남명 조식처럼 명리(名利)를 쫓지 않는 처사형 선비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일 만인 4월 23일 가솔(家率) 10여 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곧 50여 명에서 2000여 명까지 확보한다. 그는 천강홍의대장군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유격전을 전개한다. 경남 의령을 거쳐 호남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정암진 전투에서 전멸시키며 왜군의 내륙 진격과 보급로를 차단한다. 육지에서 최초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대단하다. 이로써 경남 창녕, 의령은 물론이고 김해와 성주까지 안전하게 됐다. 곽 장군은 견리사의 견위수명의 모범이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줬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전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충무공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지만, 남은 전력은 겨우 12척의 판옥전선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이 충무공은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라면서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복속하라는 임금 선조의 명을 되돌린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겁먹은 부하들을 수습해 필사즉생의 각오로 적을 이길 전략과 전술을 수립한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서 싸운 이순신은 견위수명을 실천한 최고 지휘관이었다.

우리는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6‧25사변 같은 참사를 기억하며 항상 주변국의 야욕을 징비(懲毖)해야 할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주변국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우리도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감정으로만 역사를 공부하고 국제관계를 안일하게 보면 곤란하다.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 곽재우, 안중근 그리고 이순신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같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나라의 힘을 기르고 굳건히 하는 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할 때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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