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행정팀장
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조직의 ‘근본 목적’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理想)과 같다. 전문화된 관료제는 이 근본 목적을 각자의 전문영역 또는 부서별 ‘짧은 목표’ 단위로 나눠 현실(現實)화한다. 이상은 중요한 날 리더의 선언문에만 가끔 등장할 뿐 업무 현장에서는 쉽게 잊히지만, 현실은 늘 현장 가까이에 있다. 구성원의 책상 위에는 짧은 목표와 관련된 업무들이 산적해 있고, 주변엔 그 근원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규제와 지침이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이 둘러싸고 있다. 전체 조직역량은 이처럼 제각각 움직이는 짧은 목표의 힘을 합한 값이 된다. 각각 1의 힘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전체역량이 10이 될 수도 있고, 다수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마이너스 결과로 나올 수도 있다.

연구의 방향성도 근본 목적과 짧은 목표 사이에 놓여있다.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발전하지만, 그만큼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이는 지구 생태계 관점보다는 분과 학문별로 저마다 짧은 목표에만 치중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액(GDP) 대비 연구비 투자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연구투자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자원의 배분과 회계적 관리에 더 심혈을 기울인 탓에 ‘코리아 R&D 페러독스’라는 말까지 떠돈다. 대학은 기존의 학과를 뛰어넘는 융합을 통해 연구와 교육을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정부가 BK21사업을 통해 대학을 지원하는 목적도 이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BK21사업의 세부 평가항목으로 들어가 보면 여전히 학과 중심의 분과 학문 단위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대학은 BK21사업이 새롭게 시작하는 7년마다 미래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서 19세기 학과 체제로 원점 회귀해야만 한다. 연구간접비는 연구를 수행함에 따라 발생하는 대학의 제반 비용에 대한 원가보상이고 대학 일반 회계에서 집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회계관점의 엄격한 집행관리라는 짧은 목표만 따라가다 보면 연구간접비도 사용 목적과 집행이 관리되는 직접비로 성격이 바뀌고 만다. 산학협력단 법인은 대학의 연구 및 산학협력 활동에 도움을 주기 위해 대학 내에 특수법인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산학협력단 법인 조직이 대내외적으로 학교가 아닌 별도의 조직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세법은 이미 산학협력단을 학교가 아닌 영리법인으로 보고, 정부는 총장이 아닌 산학협력단장을 연구계약 상대로 한다. 대학 본부와 산학협력단 조직 사이의 재정적·인적 장벽은 더욱 높아져만 간다. 짧은 목표의 발뒤꿈치만 따라가다 보면, 이처럼 어느샌가 근본 목적과 방향이 틀어지게 된다.

맹자는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을 강조했다. 잊어버리지도 말고, 자라는 것을 억지로 도와주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근본 목적이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짧은 목표다. 근본 목적을 잊고 짧은 목표만 추구해서 조장하려 들면 전체가 위험해진다. 21세기 최고의 탐험가 중의 한 사람인 우에무라 나오미는 자신의 책 《우에무라 나오미의 모험학교》를 통해 혼자 등반을 하거나 극지를 탐험할 때 크레바스를 예방하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긴 대나무를 마치 검처럼 허리에 차고, 그 장대를 끌면서 걸었다. 함정처럼 감춰진 크레바스에 빠지더라도 몸에 달린 장대가 제어 역할을 해서 추락을 막을 수 있으니까. 아주 단순한 발상이었다” 일의 현장에도 크레바스는 항상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근본 목적을 잊지 않는다면 시간을 횡단하는 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 통찰력은 우에무라 나오미의 장대와 같다. 내 허리춤에 찬 장대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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