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상 / 본지 논설위원, 연세대 교수.교육학

우리 대학에는 여러 개의 고질적인 장벽들이 학문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빈약한 연구지원현실이 그 하나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비를 전부 합쳐도 외국 대학과 비교가 창피할 정도로 빈약하다. 미국 연구중심 대학들의 위력은 연구비 지원능력에서 들어난다. 각 대학들은 우리 대학 전체의 연구비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 재원을 갖고 있다. 그러니 우리교수들의 연구 실적 역시 빈약하다고 탓만 할 것도 못된다. 연구는 말로만, 구호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이 세계대학별 논문의 발표 수에 있어서 단연 일등인데, 한국의 대학총장들은 그들의 재정 지원 자세부터 본받아야한다. 2001년도에 하바드대는 9천2백1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어 일본의 도쿄대가 6천4백39편을 발표했다. 캐나다의 토론토대가 4천6백33편을, 서울대는 2천5백91편을 발표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의 절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이다. 우리나라 교수 1인당 학술 논문 수가 빈약하니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교수 일인당 국내 논문은 년 평균 2.31편, 국외 학술논문은 0.44편정도를 발표하면서 그것을 대학이라고 우기고 있다. 교수 1인당 저서 수 역시 0.20권에 지나지 않는다.물론, 교수들 간에는 개인 차가 있지만, 어쨋거나 우리 대학의 연구 경쟁력이 허술하다는 점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교수들의 무기력한 연구 의욕들이 학문 발전을 한번 더 가로막고 있다. 대학 사회에서 독버섯과 같은 정실주의가 바로 그런 무기력을 키운다. 불공정한 인사 행정이나 비판 문화의 상실이 그로부터 나온다. 정실주의의 관행은 대학마다 유행하고 있는 겸임교수직에도 작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객관적인 연구 능력의 공증 절차들이 체계적으로 생략된다. 편한 자세의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선심성으로 객원교수로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그만이다. 그런 관행이 불길처럼 치솟고 있지만, 그들의 연구력은 대학의 학문 발전에 크게 보탬이 되지 못한다. 대학에서 연구가 제대로 되려면 대학의 학과가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 역시 제대로 소생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대학의 학문 문화가 제대로 되려면 학과 단위의 작은 토론들이 매일같이 꿈틀거려야 한다. 이런 과 중심의 토론 문화는 총장이 다그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학과 교수들이 소 닭보듯 서로서로에게 웃기기나 하는 그런 관행부터 바로 잡아야한다. 그렇지만 각 과 마다 학문적인 산맥들은 서로 끊기어 있다. 제자, 후배 교수가 스승이나 선배 교수의 학문적 견해에 토를 다는 것도 결례가 되고, 후학의 연구 결과에 초를 치는 것도 웃 사람이 할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격한 토론만큼은 삼가 하더라도 선후배들이 서로 서로 읽어주는 풍경만큼은 정겹게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도 실정은 그저 그렇기만 하다. 한가지 또 다른 복병이 학문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 교수들의 지적재산권 보호 문제이다. 우리 대학은 지적재산권 보호 영역에서도 꽤나 비켜나 있다.그래서 창의력있는 학자들의 지력(知力)이 매일같이 그 누군가에 의해 탈취 당하고 있다. 표절해 놓고 보기, 남의 연구 결과를 적당히 손질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와 복제하기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당하고 있다. 표절하기와 같은 지성적으로 부당한 일은 풀잎에 붙어서 새순을 갉아먹는 송충이 짓거리이다. 이런 지적재산권 절도행위에 대해 그저 너그럽기만 한 정서도 우리 대학 학문 풍토이다. 선진국의 대학일수록 대학 교수의 지적재산권 보호에 가장 앞서 있다. 타인의 연구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대학 교수들의 개인적인 양심이나 개별적인 연구 윤리를 믿어 보려는 노력은 조건없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제도가 대학에서도 우선해야 한다. 깨진 간장 종지에 꿀을 담아 보려고 제 아무리 노력해도, 꿀은 새어 버릴 수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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