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협상 노하우 담은 저서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페루 정부에 한국 전투기 수출한 사례 가장 기억에 남아
180여개 해외 공관, 청년 해외 취업 진출 발판으로 삼았으면

박희권 한국외대 석좌교수
박희권 한국외대 석좌교수

[한국대학신문 이지희 기자] “인생은 하나의 거대한 협상 테이블입니다. 우리 인생의 80퍼센트가 협상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인생은 협상의 연속인 것이죠.”

협상은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가 외교를 벌이고, 기업과 기업이 벌이는 거창한 것만이 협상은 아니다. 부모와 자녀가 오늘 할 숙제를 놓고서도 벌이는 것이 협상이다. 상점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직장에서 연봉을 조정하는 일도 모두 다 협상인 셈이다.

박희권 한국외대 석좌교수는 39년간 직업 외교관으로 살아온 삶의 노하우를 저서 「쉘 위 니고시에이트」에 담았다. 이 저서는 최근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경제, 안보, 문화, 국제법 등 분야와 다양한 문화권에서 수석대표로만 60여 차례 활동해 왔던 박 교수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일본과의 협상만 30여 년간 40여 차례를 했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는 물론 유엔과 제네바 유럽 사무국에서도 근무했죠. 경험은 많은데 이런 경험을 우리 동료와 후배들에게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외교관뿐만 아니라 협상에 필요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특히 국가 이익을 걸고 소리 없는 총성을 벌이는 비즈니스맨들에게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협상의 기억’은 무엇일까. 박 교수는 페루에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의 훈련기 수출을 지원했던 사례를 꼽았다. “우선 중남미 최초 항공기 수출 쾌거라는 의미가 있죠. 방위산업의 신기원인 셈이에요. 두 번째는 민간 기업의 외국 수출을 정부가 지원했다는 점입니다. 원래 민간 기업이 외국으로 수출할 때 정부는 보증을 설 수 없어요. 당시 페루 정부는 국가 대 국가 간 거래가 아니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죠. 하지만 한국 법률상 국가 간 거래에 민간 기업이 끼어들 순 없었고요. 당시 제가 주도한 계약인데 2500억원짜리 계약이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국가 간 거래 형식을 이끌어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란 예상은 자연스레 뒤따라 왔다. “페루 정부와 2년간 협상하는 동안 페루 국방장관이 5번 바뀌었을 정도죠. 페루 훈련기 시장을 브라질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당시 브라질 대통령이 나서서 한국 훈련기 도입을 막기도 했어요. 우리는 본질에 집중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커뮤니케이션에 공을 들였죠. 결과는 눈물겨운 계약 성공이었습니다.”

지정학적 위치 탓에 주변 강대국에 치일 수밖에 없는 한국은 여전히 협상이 절실한 나라 중 하나다. 미중 갈등 사이에 낀 상황에서 북한과는 다시 냉전모드가 됐고, 일본과도 여전히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박 교수는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탁월한 협상가를 길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주변국에 낀 상황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협상력으로 이익을 조절해야 하는데 한국에는 지금 탁월한 협상가가 부족해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갈등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요. 집단주의 문화의 잔재로도 볼 수 있는데, 과거서부터 집단의 조화가 주요한 덕목이었죠.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되고, 생기더라도 우두머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치밀한 논리나 합리성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명수가 나오기 힘든 구조인 것이죠.”

특히 박 교수는 한국의 관료 시스템과 조직 문화를 지적했다. “우리의 관료, 그리고 조직 문화는 전문가인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만능 제너럴시스트가 우대받는 풍토가 있어요. 보직 변경이 잦죠. 이것저것 경력만 쌓는 풍토에서는 한 분야의 전문가나 탁월한 협상가가 나올 수 없습니다.”

협상은 장기전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한건주의’ 방식의 졸속협상은 결코 성공적인 협상이라 할 수 없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입단한 류현진 선수의 에이전트는 악마의 에이전트라 불리는 스캇 보라스가 담당했습니다. 그의 협상이 언제 타결됐는지 아세요? 협상종료 30초 전이었습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협상을 지배할 수 있어요. 끝날 때까지 침착하고, 끈기 있게 통제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또한 협상은 한 쪽이 일방적인 독식을 하는 게 아니다. 박 교수는 협상을 “51대 49의 게임”이라고 비유했다. 흔히 한 쪽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이 협상이라고 생각하지만, 협상에 참여하는 누구든 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협상이라는 것이다. “협상의 목표는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외교관이 아닌 학자로서 강단에 선 박 교수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요즘 청년들의 취업이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해외진출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정부에 부탁하고 싶은데 현재 해외공관이 180여개가 넘습니다. 공관 네트워크를 청년 해외 진출의 종합 지원센터로 활용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지금 청년을 돕는 일이 기성세대 최고의 책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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