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식/삼성경제연구소 고문

나는 여덟 명의 대통령을 보았다. 몇 사람은 못 본게 아니라 건국이래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이니 이 나라 대통령을 모두 지켜 본 셈이다. 길고 짧았던 재임기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지난 50년은 그들을 축으로 하여 한국이라는 나라가 움직여 왔다고도 볼 수 있다. 헌법상 대통령 중심제라는 제도상에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청와대라는 공간과 그 곳에 존재하는 권력이 국가운명과 제도와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늘의 한국'은 이름 석자가 앞에 붙은 각 대통령시대가 빚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해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하지만 정치라는 상품의 지배력은 공급자 과·독점 구조였다. 이런 틀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차이가 있다면 상대적인 것 뿐이다.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로 이어졌지만 '대통령의 권력 교과서'는 대물림되었다. 그러니까 지난 반세기 동안 등장한 대통령은 집권의 과정과 국가 경영의 목표와 스타일은 달랐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르나 한 틀 속에 있었다는 얘기다. 바로 그 핵심은 권위주의다. 초법적 권력행사는 이른바 '통치행위'라는 정치적 포장에 의해 묵인되어왔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서도 이 독점권은 살아있어 후유증이 증폭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또 한 람의 대통령이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한글 세대다. 정치적으로는 '신생대 그룹'에 속한다. 그리고 그를 밀어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한 세력도 신세대 네티즌들이다. 그는 낡은 틀을 혁파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어떻게 보면 당선과정도 거의 홀로 서기였다. 그는 스스로 개혁을 부르짖고 나섰다. 그의 정적에게 표를 던졌던 유권자던 지지자던 변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그 반응은 우려와 기대로 갈려있다. 어떻든 그는 새로운 중심축이 되어 앞으로 5년 동안 나라의 틀을 새로 짜게 되었다. 그 틀을 그는 '국민참여'라고 했다. 스스로는 '국민이 참여하는 정부'를 만들어 갈 것이라 다짐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까지는 국민참여가 배제된 왜곡된 틀 속에서 정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소리로 들린다. 그 왜곡된 틀이 생성되어 온 것을 애써 감추려했는지 모르나 그건 청와대와 대통령의 권위주의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새 대통령의 과업은 바로 대통령 상(像)을 새로 만드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초심(初心)을 말한다. 권력자의 초심은 시간과 더불어 풍화(風化)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 내는 틀 속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다. 지난 날 권좌에서 일어난 비극들은 그렇게 함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왜곡된 권력의 회로는 시간과 더불어 정치적 태풍을 일으키고 이번에는 역으로 권력의 중심부를 휩쓸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목격해 왔다. 아마도 새 대통령이 싸워야 할 상대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일지 모른다. 지금은 모르지만 집권 후 2년쯤 가면 그 실체가 자라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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