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극작가 중에 아더 밀러라는 사람이 있다. 마릴린 먼로의 세 번째 남편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그의 작품 중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다. 능력을 위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를 파헤친 작품으로, 잘나가던 세일즈맨이 어느날 건강을 잃고 가정의 불화에 직면하고 파산하는 과정을 그린 희곡이다. 세일즈맨이라면 가히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랄 수 있는 존재이다. DJ가 오죽하면 세일즈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겠는가. 살아남으려면 일차적으로 세일즈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로 넘어오면 새뮤얼 베케트라는 극작가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그의 작품 중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다.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게 삶의 전부인, 그래서 나날이 무의미해져가는 두명의 남주인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부조리극이다.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세일즈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인물, 그게 우리나라의 시간강사들의 현주소다. 교수임용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워진 상황에서 여전히 교수임용을 기다려야하는 지위란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의 모습과 그다지 멀지 않다. 학문을 상품처럼 포장해서 팔아야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객의 구미에 얼마나 잘 맞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벌어들이는 수입의 량에 차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강사의 지위는 또한 세일즈맨의 그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과 유사한 점은 신분보장이 안된다는 점이다. 세일즈맨의 핵심은 신분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만이 생존을 보장하는 정글의 존재가 된다. 시간강사도 마찬가지인데, 신분보장이 안되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될 여지가 없고, 시간강사의 생과 사는 오로지 학문이라는 상품의 판매기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시간강사 사회의 경쟁은 세일즈맨 사회의 경쟁을 정확히 재현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헌데, 시간강사 사회의 파이는 세일즈맨의 그것에 비해 현격히 왜소하다. 강사료가 시간당 기껏해야 1만원-4만원 수준이다. 이 사실을 알고나면 적자든 도태자든 허탈해지고 만다. 경쟁이란 게 도무지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이틀전 S대 강사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수임용에 탈락한 좌절감과 경제적 압박감이 겹친 탓이라고 한다. 교육계에서 뿐만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하다. 반응은 엇갈린다. 그래도 그렇지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갈 수 있느냐는 축과 그럴 만 하다고 하는 축. 같은 시간강사 신분으로서 어느쪽 반응도 섣불리 손들어주기 어려웁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건 이미 예고된 일이었었다는 것이다. 시간강사가 세일즈맨으로 전락한 마당에 그 점을 감지하는데 무슨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일인가. 세일즈맨의 죽음이 예고된 것은 이미 1960년대였었다. 시간강사의 제일 목표라면, 교수임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상황에서 그것은 매우 버거운 목표이다. 수요 공급의 원칙이라는 단순한 경제원리를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것은 단박에 눈에 잡힌다. 평생을 고대해도, 그것은 안될 수도 있다. 교수임용은 명예와 경제문제의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된다. 교수임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명예는 뒷전으로 미루어놓을 수 있지만, 경제문제는 아무래도 뒷전으로 미루어놓을 수 없다. 먹고사는, 지금 당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강사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로 집약된다. 헌데, 신분보장이 안되고서 경제적 안정이 가능한 일인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분보장이 확보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해결책은 양당간에 하나인 것 같다. 시간강사의 지위를 지금처럼 여전히 세일즈맨의 지위로 방치해 둘 양이면 그 파이를 확장시키라는 것이다. 시간당 강사료가 기껏해야 1만원-4만원이 아니라 1천원-1백만원에 이르기까지 현격한, 차등과 등급을 매기라는 것이다. 경쟁과 도태와 살아남는 맛과 돈버는 맛을 만끽할 수 있게끔. 그게 아니라면 시간강사의 신분을 보장해야 한다. 대학 사회의 일원으로 정당한 인정을 받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와같은 영향관계의 성립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개선이 있어야만 한다. 시간강사의 목소리가 대학사회의 정책과정에 반영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경제적 문제만의 해결은 아닐 것이다. 이호림 객원기자 <영서대, 영남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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