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 비관 자살...어느 시간강사의 슬픈 자화상

그 분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저 다음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말밖에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얼마전 서울대 시간 강사로 일하던 ㅂ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간강사와 연구원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7살된 딸아이를 가진 가장으로서 그가 가진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카드 이자와 대출금 이자를 갚아나가다 보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가운데 아내에게도 부담을 많이 줬다고 그의 유서는 밝히고 있다. 한국에서 시간강사를 한다는 것은 중. 고등학생 학원강사만도 못한 직업이다. 보습학원의 경우는 실력으로 이름이 알려지면 한달 수입이 여느 대기업 사원 못지 않게 번다. 그러나 20대를 공부하는 것으로 보내고 기껏 30대 초반에 박사학위를 받은 이 땅의 수많은 박사들은 설 곳이 없다. 대부분의 박사 학위자들은 대학교수를 꿈꾼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교수말고는 딱히 할 것이 없다. 대졸자 취업이 잘 안 되는 지라 무작정 놀고 있을 수 없는 이유로 대학원을 진학하고 뜻이 있건 없건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다. 시간강사의 월급은 대학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시간당 2 ~ 4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 ㅂ씨의 경우도 한 과목을 가르치며 한 달에 40여 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 여러 대학의 여러 과목을 맡아야 만이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언제까지 시간강사만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그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하더라도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시간강사자리마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학력의 인플레가 가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취업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벌어질 일은 부정적이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환경미화원 공채에 응시했다는 사실을 뉴스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기형적인 취업시장의 형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이 같은 악순환은 계속 될 것이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외국어 수준만을 최우선으로 삼아 채용을 하는 식으로는 해당분야의 전문성도 획득할 수 없을뿐더러 독창적인 발상 역시 얻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학은 사회의 눈치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있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양성소로 변해버린 데는 교육당국과 더불어 대학당국의 책임도 막중하다. 대부분의 대학이 토익점수가 일정정도 되지 않으면 졸업을 시키지 않는 다는 것을 입시 홍보로 한다. 그게 무슨 홍보 거리가 되는가. 사회분위기가 그렇다 해서 대학이 저항을 한 적이 있는가. 기업체들이 보내는 자격요건에 부합하는 학생을 만들고 많은 수의 학생을 입사시키면 그것을 다시 홍보하고 학생을 모집한다.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는 지 모르겠다. 교수 1인당 학생수가 중. 고등학교 교사들 수준보다 많다고 한다. 참으로 모순이다. 학생을 수요자로 생각하고 대학을 상품으로 인식하는 모순된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다른 희생자를 낳지 않으려면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이랬다 저랬다 제 밥그릇 찾기 위한 교육당국과 각종 단체들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들이다. 대학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단 하나의 대학이라도 기성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을 거부하는 몸부림을 한다면 나비효과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 있는 대학을 기대한다. 박사학위를 가지는 것은 그만큼 해당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만큼의 보수를 주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지식을 요구해야지 취업능력을 가르치라 한다면 학위의 가치는 상실된다. 우리나라도 버스기사 월급이 대학교수 월급보다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직업의 균형은 보수에서 온다. 교육갖고 장난치는 무리들이 사라지고 제발이지 대학이 독립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차정인 객원기자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저널리즘학과 신문전공> [관련기사 : 서울대 강사 교수임용탈락 비관 목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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