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달라졌어요. ‘막걸리 고대’는 옛말이죠. 이젠 ‘와인 고대’입니다.” 사발식으로 ‘막걸리 찬가’를 불러제끼던 곳. 4·19를 시발로 우리 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에 항상 빠지지 않던 이름. 투박과 촌스러움의 대명사인 ‘고대풍’이라는 조어를 자긍심으로까지 우직하게 승화시킬 줄 알았던 그 대학이 변하고 있다. ‘친숙함이 인식을 장애 한다’고 했던가. 보는 시각을 달리 하지 않고서는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대학 홍보 도우미 곽은정 양(노문3)의 주문. 대학캠퍼스의 개념을 바꾸고 캠퍼스 조경의 새장을 열었다는 중앙광장.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이다. 그 곳을 정점으로 좌우에 1백주년 기념관과 종합강의동이 들어설 계획이다. 또 2005년까지 제2산학연구동, 제2경영관, 교양관 등을 선보인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녹지 위에 최첨단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가는 신개념의 그린캠퍼스로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 고대 투어에는 지도가 필요하다 = 꼬깃꼬깃 접힌, 어른 손바닥만한 지도를 가로로 여덟 번, 그리고 세로로 두 번을 마저 펼쳐야만 고대의 진경을 한 눈에 맛볼 수 있다. 주요 건물의 수만도 60여 동이니 그도 그럴 만 하다. 시작은 정남향에 위치한 정문. 다니기 편리 하라고 바닥은 붉은 빛깔의 아스콘으로 덧씌웠다. 바닥 모양새가 마치 혀를 낼름 내밀고 있는 듯하다. 영원한 라이벌 연대생들을 반기는 고대생들만의 짓궂은 인사법인지, 김영삼 전대통령의 학교 출입을 막기 위해 연좌했던 열혈의 표징인지. 첫 발걸음부터가 경쾌하다.
고대의 중심에는 ‘중앙광장’이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운동장으로 불리던 터. 1938년 7월 준공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국군과 미군의 주둔지로 사용되는가 하면, 4·19 혁명의 불꽃이 점화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반민주·반독재 항거의 장소로 ‘민족 고대’의 집결지였다. 그 곳이 총 1만9천여 제곱미터의 녹지에 수목과 분수, 벤치 등으로 단장된 광장으로 탈바꿈했다. 광장은 민주주의, 번영, 공공성,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미래를 응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조만간 학교 담장도 허물 계획이다. 광장에는 학생과 시민의 구분이 없는 법. 착공 20개월 만인 지난해 5월의 일이다. 지하에는 1천여 대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지상의 녹지를 지키기 위해 차는 모두 지하로 몰았다. 대학가의 벤치마킹 1순위로 급부상할 만큼 반응이 좋다. 지난해 서울시에서는 ‘올해의 조경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지하 2, 3층이 주차장으로 마련된 반면 지하 1층은 학생들의 편의시설들로 채워져 있다. 1천1백여 석의 도서관 열람실과 학사행정을 지원해 주는 원스톱(One-Stop) 서비스센터, 그리고 일반서적이나 기념품, 문구류 등을 살 수 있는 유니스토어, 인터넷룸, 패스트푸드점 등이 들어섰다. ‘대학 내의 코엑스몰’인 셈. ◇ 고아한 건축물과 녹지의 변주 = 서붓서붓한 몸짓으로 치받이 길을 헉헉대며 올라야 한다. 갈 길이 멀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고대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주는 웅장한 석조건물들. 각종 CF나 드라마 촬영장소로 이미 친숙해진 곳들이다. 본관은 사적 285호, 중앙도서관은 사적 286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곳. 시계탑으로 더 유명한 서관은 ‘호상’과 함께 고대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물. 또 대학원과 법학관 그리고 중앙도서관을 사이에 끼고 마치 섬과도 같이 존재하는 동산이 하나 있다. 바로 사색의 동산. 고아한 건축물과 녹지가 변주해낸 고대생들의 지적 요람. 이곳은 언제나 서늘한 바람이 분다.
고대 건물 대부분이 석조건축물인데 반해 가운데 유일하게 벽돌로 지은 것이 하나 있다. 정경관. 서문 바로 앞에 위치해 학생들은 아예 이 권역을 ‘정경대후문’으로 통칭한다. 여기서 우수개 소리 하나. 고대에는 여관이 둘 있다는 설. 금남의 공간인 여학생회관을 줄여 여관이라 부른다. 나머지 또 하나의 장급여관은, 이름하여 언덕 위에 빨간집, 정경관이다. 아니, 정경장이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 고르바초프 구 소련 서기장, 알렉스 캘리니코스 요크대 교수 등 세계 유명 인사들과 석학들이 돌아가며 단상에 올랐던 인촌기념관. 고대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의 묘가 있던 터에 선생의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해 지었다. 이제부터가 ‘녹지캠퍼스’로 향하는 길목이다. 1997년 생명과학관과 한국학관 기공식을 가지면서 조성이 본격화된 권역. 그간 그린벨트지역으로 묶여있던 이 곳은 기숙사 안암학사가 세워지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산림(?) 그 자체였다. 이후 학교에서 녹지캠퍼스라는 별도의 이름까지 붙여 녹음관리에 들어간 상태. 고대의 최북단인 동시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노천강당. 1만2천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앉을 수 있는 이 곳은 자연 녹지와 더불어 서울 시내를 한 눈에 조감할 수도. 5월에 가장 사랑 받는 곳 가운데 하나로 석탑대동제의 하이라이트 응원축제 입실렌티도 개최된다. 그 옆에는 1998년 6월에 완공된 아이스링크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 하산을 해야할 때. 길은 두 갈래. 자연계 캠퍼스와 잇닿아 있는 지하철 6호선 ‘안암역’과 종합생활관에서 에스컬레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바로 연결되는 ‘고려대역’. 특히 지하철 역사 위에 지은 종합생활관은 시청각실과 강의실, 그리고 은행, 패스트푸드점 등 각종 편의시설 등이 갖춰져 있어 기능성이 녹음의 캠퍼스를 더욱 쾌적하게 만들고 셈이다. 눈앞의 ‘도원경’에 절로 잠이 쏟아져 부친 이름 ‘꾸벅잠길
학내 곳곳의 이름이 이렇게 재미날 수 있을까. 본관 앞 잔디밭의 이름은 ‘해뜰’. 날씨 좋은 날 그 곳에 누워보면 금방 안다. ‘광합성’하는 기분이란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받고 나올 때만이 마주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마치 로렐라이의 유혹에 빠진 듯, 눈앞의 도원경에 이끌려 절로 잠이 쏟아진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 ‘꾸벅잠길’. 학교 지도를 놓고 보면 마치 사람의 얼굴이 연상된다나. 그럼 정경관 옆 서문은 사람의 얼굴로 치면 영락없이 귀. 그 곳에 은밀히 숨어 있는 작은 쉼터가 하나 있는데, 그래서 그 곳은 ‘기엉머리’란다. 귀 뒤로 넘긴 머리에서 따 왔다. 문과대의 ‘언어와 첨단과학’ 시간. 과제는 학내 길 이름짓기. 언어과학학과 강명남, 강은지, 박재후, 성문재 네 학생이 한 팀을 이뤘다. 학내 곳곳을 다니며 기발하게 혹은 소박하게 부친 이름이 마흔 하나. 긋터, 나릿물, 다솜길, 돋움길, 옛바람길 등 고운 우리말이 대부분이다. 석탑길, 호안길, 석빙고길 등 고대의 내력 그 자체가 이름으로 옮겨온 경우도 있다. 또 폭풍의 언덕, 할딱고개, 빼빼로, 눈맞춤길 등 위트 넘치는 예도 보인다. 본래 프로젝트는 가상 가이드맵 시스템 제작. 지도를 만들자니 자연 학내 길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외국의 캠퍼스는 큰 건물 중심으로 흔히 소개되는 우리나라의 각 대학 구내 안내도와는 달리 길 이름 중심으로 작성되고 있다는 사실도 참고했다. 완성된 가이드맵에서는, 해당 위치를 클릭하면 별도의 창이 뜨면서 이름을 짓게 된 배경과 함께 사진 등 다양한 읽을 거리가 제공된다. 지도교수인 유석훈 교수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보여준 학생들의 호응은 대단했다”며 “애교심은 작은 것 하나에도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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