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식 / 언론인, 본지 논설위원

대한민국의 주민등록 번호를 가진 사람은 모두가 ‘국민’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은 각자 다른 고유의 번호를 가지고 있다. ‘국민’은 전체이자 개체라는 극히 미묘한 의미를 그 속에 담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국민을 뭘로 알고 있어?!'다. 자신의 생각과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전체를 대변하는 뜻을 담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국민의 이름을 빌어 벌어지는 비난과 항의는 권력자와 그 주변에 집중되는 현상을 빚어왔다. 더 똑 떨어지게 밝히면 김대중 대통령 이후 두드러져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극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런 항의와 비난이 섞인 말은 군부 독재시절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국민 알기를 뭣 같이……'하며 목청을 높인 쪽은 지식인 계층이었다. 정치권력의 독점과 비민주적 행정과 인권탄압이 극심했던 탓에 그들의 목소리는 전체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룩되고 사회진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념의 문제와 이해충돌로 대립이 될 때 앞세우는'국민'이라는 이름은 애매 모호한 정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개체성은 분명하지만 전체성은 부재인 것이다. 전체국가가 아닌 이상 다른 논리와 의견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예의 '굴복의 게임’으로 전체화하려는 독재현상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문제인 것이다. 물류대란이나 NEIS 파동을 지켜보는 개체로서의 국민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표가 많은 쪽으로 가기로 했다면 국민투표를 해 보아야한다. 아마 그런 의사 결정과정을 통했다면 결과는 뒤집어지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 국가경영이라는 것은 그런 군중정치를 넘어 역사의 먼 지평을 바라보아야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국민의 뜻대로 해서 잘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말은 분명 진리이다. 국민의 뜻이 분명해도 그럴 것인데 그 국민의 뜻 자체가 애매할 때 결과는 뻔한 이치다.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주장에는 그 주장의 힘이 되는 배경이 있다. 그리고 배경의 제일 뒤에는 국민이라는 존재가 있다. 여기서의 국민은 집단세력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집단세력들은 ‘국민’을 참칭한다. 단순한 지지만이 아니라 이념적 동조까지 주장하고 나선다. 여기에 압력수단까지 빈번히 발동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독재성을 드러낸다. 이제는 정치권력의 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세력의 독재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매스컴을 지배하고 있었던 독재 혹은 독점 이데올로기를 혁파해 냈다고 자부하는 세력이 같은 양식을 닮고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더욱이 노무현 정부는 그 독재성에 밀려가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화의 과정이라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라면 인내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속셈은 ‘정치적 결정’이라니 ‘국민 참여정부의 팻말’은 어디로 행방불명인지 알 길이 없다. ‘국민’이 되려면 노동조합 가입이 필요조건이 아닌가 싶다. 이제 국민은 ‘하나가 아닌 시대’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입장에 따라 분류하면 여러 갈래로 분파될 수 있다. 생각은 다양하고 지지하는 성향도 딱 둘이 아니다. 다원적 가치가 존재하는 만큼 조정은 어렵다. 국민의 지지 여론은 숫자로 나타날 수 있으나 그것이 진정한 국민생각의 실체일 수는 없다. 선거를 통한 지지율도 참여율(때로는 50%에도 미달)을 감안하면 그 곳에 허구가 숨어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출중한 제도이지만 그만큼 결함이 많다고 들 한다. 장점의 실험이 아니라 결함 속에만 빠져들고 아닌가 걱정이다. 저마다 국민이라는 힘을 내세워 압박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국민의 이름으로 고발하는 현수막들이 거리의 곳곳에서 아파트 단지에서 나부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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