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혁 / 한국외대 강사, 정치학 박사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4월 23-24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 이후 대화를 통한 북핵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당분간 멀어질 징후마저 나타나고 있다. 북한 외무성이 18일 "미국이 표방하는 그 어떤 다자회담에도 더 이상 기대를 가질 수 없게 됐다"고 선언함으로써 최근 한-미-일 3국이 추진해온 5자회담은 열릴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은 외무성 성명에서 미국 등이 추진하는 다자회담이 북한에 대한 "고립압살행위를 가리우는 위장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그에 대하여 "자위적 핵억제력을 강화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초강수를 띄우고 있다. 물론 북한이 최근의 정세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미 부시정부가 취임 직후부터 대북 강경정책을 전개해온 것은 잘 알려져있다. 부시정부는 북한의 과거 핵개발에 대한 특별사찰을 조기에 실시할 것과 미사일 개발 및 수출 금지, 휴전선에 배치된 재래식 군사력의 후방배치 등 강도 높은 요구를 취해왔다. 부시정부는 급기야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선제 공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며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미, 미-일 정상회담 이후 미국은 일본과 함께 북한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마드리드회담에서 10여개 우방국들과 함께 대량살상무기 확산국에 대해서는 해상봉쇄 등 군사적 조치를 가할 필요성을 확보한 바 있다. 또 최근 일본이 북한을 겨냥하여 취한 일련의 조치도 미국과의 '공조'에 의한 대북압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북한의 만경봉호에 대한 안전검사를 명분으로 북한으로의 출항을 못하게 하거나 총련에 대한 과세 조치를 취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미국이 한국, 일본 등과 추진하고 있는 5자회담이 북한에게는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보일 수 있다. 북한은 3자회담에서 핵무기 보유를 밝히고 미국에 '새롭고 대범한 제안'을 하였는데 미국이 이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부시행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대북 핵외교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을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우방국의 협조, 국제여론 그리고 필요하면 강압적 방법을 동원하는 채찍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워싱턴을 다녀온 북한문제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에서 느낀 바와 달리 북핵문제에 대한 여론이 미국내 여론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강 이북 주한미군의 후방배치가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부시행정부는 북핵문제를 다자회담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한국이 불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만스럽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때일수록 북한은 미국과 어떠한 형태의 대화에도 응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에 국제사회의 합의가 높아지는 것과 비례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보듯이 보다 충분하고 인내심 있는 외교적 노력의 필요성도 더욱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유럽연합의 15개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6월 16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위해 유엔, 군축포럼, 국제원자력기구 등 다자기구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공동외교전략은 외교적 압력을 포함한 다른 수단이 실패할 경우 강제조치를 검토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이전에 다자기구 등을 통한 외교적 노력을 다할 것으로 밝히고 있다. 다자회담 등 외교적 접근이 단지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압력의 장식물이 아니라는 점은 북한의 전통적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이들 국가가 북한과 미국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북핵문제 해결의 외교적 접근을 지지하고 있으며, 3자회담 이후 다자회담의 참가국과 관련해서는 북한과 미국의 결심에 달려있다고 말해 북-미회담의 필요성을 간접 시사했다. 러시아는 작년 10월 소위 북한의 핵개발 시인 파문 이후 외무차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미 직접대화를 촉구하는 등 주변국들 가운데 북한의 입장을 가장 많이 옹호해왔다. 중국은 프놈펜에서 외무장관의 5자회담 가능 발언 이전까지 3자회담 재개를 지지할 정도로 북한의 입장을 고려해왔다. 그러나 한-미-일 대북정책조정회의에서 5자회담 방침이 나온 이후 간접적이지만 5자회담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럼에도 중국이 공식적으로 5자회담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입장을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중-일 외무장관회담이 열린 6월 17일 아세안 10개국 외무장관들의 북핵 관련 성명도 북한의 입장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 아세안 외무장관들은 회담 후 발표한 성명에서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해 미-한-중-일-러 등 5개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제의하는 등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북한은 3자회담 이후 미국과의 대화가 전제된다면 회담 형식에는 구애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 등지에서 북한이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위해 마약밀거래 등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럴 경우 나포와 같은 무력행사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북한의 관영언론은 이를 미국의 모략이라고 비난하고, 북한은 미국의 해상봉쇄가 추진될 경우 그것을 주권침해로 간주하고 물리적인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자국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지지하는 중국, 아세안, 한국 등을 바탕으로 다자회담의 의제에 자국의 관심사를 넣고 북-미대화와의 병행을 조건으로 5자회담에 응하는 것이 자국의 필요에 부응할 현실적인 초선의 방안이라고 하겠다. 미국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가한다면 최근 일련의 대북 압박조치를 대화 조성을 위해 유보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북핵문제는 탈냉전기 국제사회에서 경합하는 두가지 국제규범인 비확산규범과 주권 규범의 미래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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