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신분상승의 도구입니다." 이것은 지금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 안전 보좌관직을 맡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가 한 말이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지금까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이에 동의하거나 이런 말을 해 왓다고 하더라도 콘돌리자 라이스처럼 조상이 미국땅에 끌려와서 대대로 노예가 되고 그후 노예해방 뒤에는 할머니대까지 백인 밑에서 전과 거의 다름없는 하녀노릇이나 하던 집의 흑인 여자로서는 지금의 신분상승은 너무도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이스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교육에 대한 이런 신념을 지녀 왔고 그녀에 이르러 이 신념은 너무도 놀라운 성과로 나타난 것이다. 부시가 어떤 인물이든간에 그가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그에게 최측근에서 그런 자신감을 심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라이스라면 그녀는 교육의 힘으로 신분상승을 해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른 해석은 다 생략하고라도 교육이 곧 신분상승의 도구라는 말은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특히 한국이 그렇다. 우리에게 대학교육은 국가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분 상승의 필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을 온갖 고귀한 말로 미화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교육은 그보다 먼저 남에게 뒤지지 않고 설음받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신분 문제에 속하는 것이며 그래서 기를 쓰는 교육의 광란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대학 교육이 그렇다. 대학을 못나오면 한평생 만사가 남한테 꿀리고 힘들게 되는 나라가 아닌가? 또 어느 대학이냐도 그렇다. 대학의 서열은 곧 사회적 신분 서열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교육은 밑으로의 추락방지용인 동시에 신분상승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꼭 절대적 현실은 아니다. 대학 서열주의라는 편견이나 패거리 파벌의 식이나 줄서기등 온갖 것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일생의 모든 결론이 나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편견들이 아무리 판치는 사회라 하더라도 어찌 미국의 흑백 인종 사회만큼 심하랴. 그런데도 미국에서 라이스가 그렇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완강한 편견이 그녀의 실력의 힘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실력은 그녀가 말한 "교육"의 힘이다. 그 때문에 라이스는 27세에 석사를 마치자 마자 명문 스탠퍼드대학의 부교수가 되고 33세에 정교수가 되고 46세에 지금의 자리에 이른다. 전공하던 분야에서 항상 일등을 하겠다는 다짐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런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방학이다. 방학은 쉬는 기간이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이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한단계 상승하고 싶다면 이런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뒤처진 거북이가 토끼를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은 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며 방학이야 말로 앞질러 달리던 많은 토끼들이 낮잠 자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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