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 본지 전문위원,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나라당의 공영방송 흔들기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방송구조 개편부터 프로그램 진행자에 대한 자질 시비까지 그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KBS2와 MBC 민영화, KBS 시청료 폐지 등을 골자로 한 ‘방송개혁안’은 지난해의 지방선거 국면에서 이미 한 차례 써먹은 것이다. KBS가 신설 다큐멘터리 ‘인물현대사’의 진행자로 영화배우 문성근씨를 선정하자 문씨의 ‘노사모 전력’을 문제삼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1일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도로 국회의 KBS 결산 승인안 부결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안은 이미 문화관광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간에 합의 통과된 것이었다. 곧바로 KBS 예산까지 국회에서 사전 심의하도록 방송법을 개정하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공영방송에 대한 한나라당의 반감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하다. 올바른 진단이든 아니든 방송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졌다는 정서가 내부적으로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다 내년 총선까지 염두에 둘 때 공영방송의 일거수일투족은 한나라당 입장에서 정치적 사활이 걸린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해와 동의의 차원은 다르다. 방송정책은 그 나라의 운명까지 좌우할 사안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다른 건 차치하고 한나라당이 지난달 19일 발표한 방송개혁안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다. 예컨대 MBC가 민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감사원으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감사원은 정부에 대하여 회계감사와 직무감찰을 수행하도록 헌법으로부터 그 기능을 부여받은 기관이기 때문에 민영방송은 피감기관이 되지 않는다. 또 시청료 폐지 주장은 KBS1마저 재원을 광고에 의존토록 하는 것이다. 도대체 공영방송 자체를 없애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수신료는 한푼도 받지 않는 공영방송 체제를 지향하겠다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논리적 모순으로 뒤범벅된 한나라당의 방송개혁안은 공당으로서의 방송철학과 이념이 투영되었다기보다 급조된 인상을 준다. 더욱이 방송사와 언론노조, 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잇따르고 심지어 한나라당의 원군처럼 행세한 조중동이 확실한 지원사격을 보내지 않음을 감안할 때 이번 개혁안이 사려 깊게 고안된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힘들다. 결국 한나라당의 방송개혁안은 공영방송을 길들이기 위한 정치적 공세의 성격이 짙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교육문제에 관심이 컸던 존슨 대통령이 1968년 공영방송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출범한 PBS는 진보세력을 대변한다는 이유에서 보수파 정치인들의 숱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에 레이건 대통령은 PBS에 대한 지원액을 대폭 삭감해 이 기간 동안에만 연방 정부의 지원액 규모가 26%에서 16%로 대폭 축소되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는 밥돌 상원의원이 PBS가 선거보도 취재를 민주당 지지자로 알려진 모이어스와 그라이더에게 맡겼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PBS 비난 연설을 했으며, 1995년에는 하원의장 깅그리치가 PBS에 대한 자금지원 전면 중지와 PBS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부터 끊임없이 전개된 보수세력의 고사 전략에도 불구하고 PBS는 오늘날까지 미국이라는 고도의 상업소비사회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는 공공영역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시청자를 ‘소비자’로 인식하는 상업방송이 여론과 문화를 주도하는 미국적 환경에서 PBS만이 거의 유일하게 시청자를 ‘시민’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장과 논리로 달성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결과다. 우리나라 공영방송이 터무니없는 정치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으로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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