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용(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대학교육에서 기초과학의 역할은 대략 다음의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초과학은 첫째, 교양교육의 일부를 이루고, 둘째, 공학 등 다른 전공교육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셋째, 각 기초과학의 전공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한국의 대학에서 기초과학은 위의 3가지 항목 모두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물리학의 예를 들면, 교양필수가 없어진 후 이학계열이나 공학계열 학생 중 일반물리학을 수강하는 학생의 비율이 1/5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수강하는 학생들도 전공을 공부하는데 필요하다는 어렴풋한 생각에 수강신청은 했지만 수업에 임하는 관심이나 열의는 아주 낮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학부제 이후 그 수가 반 이하로 감소했다. 이는 대학원생의 감소로 이어져 물리학이 계속 발전해 나가는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한다. 학문도 결국은 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보다 풍요롭고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이라면 도태되어도 아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기초과학이 사회에 더 이상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사회가 이를 기피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근래에 많이 거론되고 있는 이공계 위기의 일면이다. 이공계의 위기를 어떤 사람들은 자연과학, 공학 대 의학, 치의학, 한의학의 구도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과학기술 대 경영, 법률, 금융 등의 구도로 보기도 한다. 대학진학 때 이공계를 피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물리학이나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의대나 한의대를 가기 위해 다시 고등학교 공부를 시작하거나, 변호사나 변리사가 되기 위해 고시공부를 시작하는 것 들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좋은 현상이다. 자기의 치즈가 다 없어지기 전에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는 일은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문제가 된 이유는 한 사회가 계속 잘 살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의 개발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담당할 인력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원칙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들의 대우를 잘 해주면 된다. 최근에 고위공무원의 이공계 비율을 높이려는 정책이나 기업의 임원들의 이공계 비율이 증가하는 것 등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공계 위기는 넓은 의미로 인문학의 위기까지 포함하여 "돈이 되지 않고 가볍지 않은 분야"의 위기라 할 수 있다. 100여 년 전쯤 Maxwell을 비롯한 일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정립된 전자기학은 현재의 정보.통신 혁명을 가져 왔고 이에 따라 글과 인쇄물의 시대가 영상, TV의 시대로 대치되고 있다. "매체는 매세지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처럼 TV 시대의 유쾌한 분위기에서 진지한 담론은 설 자리를 잃는다. 멋진 신세계에서 당혹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대신 웃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왜 웃는지, 또 왜 사고하기를 멈추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TV에서 재미있는 코미디 프로를 볼 때 저절로 터져나오는 "와우", "짱이다" 따위의 외마디 탄성 보다 더 길거나 복잡한 텍스트는 고문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쇼비즈니스의 시대에 진지한 학문들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지 원론적인 이야기밖에는. 인쇄물의 시대에 가치 있게 여겨졌던 추상적 사고능력, 분석 종합력 등이 TV 시대에도 가치가 있는 자질이라면, 사회가 이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능력을 진지한 학문을 통해 배우려고 할 것이다. 걱정스러운 일은 시장원리를 통해 진지한 학문이 제 자리를 찾기 전까지 기초과학의 쇠퇴로 인한 국가경쟁력 상실에 어떻게 대처할 건가 하는 일이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근본적 처우개선 밖에는 길이 없다. 정부 고위공무원, 정치인, 그리고 기업 임원 등의 이공계 비율을 늘리고, 과학기술인의 급여와 인센티브를 늘리는 일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 플러스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성된 기초과학, 또는 과학기술이 우대 받는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전공해 새로운 가치창조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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