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럽다. ‘을씨년’에다 해당성을 나타내는 어미 ‘스럽다’가 붙어서 이루어진 형용사 ‘을씨년스럽다’는 현재 '남이 보기에 퍽 쓸쓸하다. 살림이 매우 군색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1905년에 있었던 을사보호조약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 익히 알다시피 1905년 을사년은 일제가 을사오적이라 부르는 이완용을 비롯한 당시 친일 관료들을 앞세워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통감정치를 실시한 치욕적인 해이다. 이 을사보호조약은 당시의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 전권 공사인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총 다섯 조문으로 된 이 조문에 의하여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강제로 일본에 빼앗기고 만 것이다. 형식적인 한일 합병은 1910년 경술년에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을사보호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외교권이 일본에게 빼앗겼으므로 이 때부터 우리나라는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이 을사년은 우리 민족에게는 가장 치욕스럽고 초라하고 쓸쓸한 해였다.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랜 동안 우리의 마음이나 날씨 등이 어수선하고 흐리며 쓸쓸한 상태를 ‘을사년스럽다’고 했었는데 그 뒤에 이것이 변하여 현재는 ‘을씨년스럽다.’로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을씨년+스럽다’로 분석되는데 다시 여기서 ‘을씨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을사년→을시년→을씨년」이 된다. ·지천꾸러기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 남에게 까닭 없이 원망을 사는 사람 혹은 힐책과 지천을 먹는 사람을 일컬어 ‘지천꾸러기’라고 한다. 이 말은 ‘지천’과 ‘꾸러기’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인데 ‘지천’은 까닭 없이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짓을 뜻하는 것이고 ‘꾸러기’는 어떤 명사 밑에 붙어서 그 명사가 가지는 뜻의 사물이나 버릇이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 이를테면 ‘심술꾸러기’, ‘장난꾸러기’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생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본래 ‘지천’이란 조선조 인조때의 문신인 최명길(1586-1647)의 호 지천(遲川)을 가리키는 데, 그 최명길은 병자호란과 깊은 관계가 있는 분이다. 지천 최명길 선생은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의 자리에 있다가 1614년에 광해군의 폐모론에 연루되어 한 때 파면되기도 하였다. 1623년 김유, 이귀 등과 함께 모의하여 인조를 영입한 공로로 이조참의에다 1등 공신이 되고 완성군에 피봉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지천은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함으로써 화의(和議)가 끝나, 호병(胡兵)들이 돌아간 후, 조야(朝野)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으나 왕의 만류로 경기관찰사에 나감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 다시 그는 여러 내직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사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서울까지 쳐들어온 청병(淸兵)이 마침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조정 신하들은 일제히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지천 혼자만은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던 중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져 결국 인조는 지천의 주장대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화해가 아닌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청나라에게 국치(國恥)의 쓰라림을 당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의 많은 신하들은 이 국치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 결국 지천 때문이라고 지천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실이 차츰 세상에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로부터 힐책이나 원망을 받게 되는 사람을 가리켜 ‘지천꾸러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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