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오늘날의 과학기술과 ‘과학적 의학’은 현대사회의 산물이자 현대를 현대답게 만든 중요한 동력이다. 과학기술과 의학은 그 ‘도구적’ 힘으로 고도의 생산력을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성찰적’ 속성으로 인간 사회를 합리적인 모습으로 바꾸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인간은 과학기술과 의학을 통해 자연에 대한 무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미몽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 수 있었으며, 또 그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획기적으로 드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학기술과 의학은 초기의 역동성과 긍정적인 측면을 잃게도 되었다. 예컨대 핵무기 제조를 통해 과학기술은 인류의 벗이 아니라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과학기술과 의학은 점점 일반인만이 아니라 분야가 조금 다르면 전문가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 되었다. 종교가 소수 특권층의 손아귀에 놓일 때 인간 해방의 메시지가 아니라 인류를 억압하는 장치가 되듯이, 과학기술과 의학도 신비화되면서 인간을 오히려 억압하고 소외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괴물이 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과학의 모든 면을 부정하고 배격하는 ‘반과학’(‘신과학’이라는 외피를 쓰기도 하는) 경향이 나타나 ‘과학만능주의’와 더불어 과학의 참 가치를 위협하게 되었다. 그 점은 의학과 생명과학에서 특히 뚜렷하다. 유전자를 바꿔치기하여 생명의 설계도를 다시 그리고 또 그러한 생명을 무한정 복제할 수 있게까지 된 21세기의 의학은 그 놀라운 효능만큼이나 인간이라는 종(種)과 생태계 전체에, 시․공간적으로 핵무기보다 더 끔찍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첨단의학 시대’에 우리는 인간성과 생명의 존엄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의학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서도, 오직 성장과 발전이라는 키워드만이 아니라 그것의 윤리적․사회적 의미라는 맥락으로 의학을 파악해야 한다. 즉 ‘인간복제’와 ‘유전자변형’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열광하거나, 조건반사적으로 두려워하고 배격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의학과 과학 본연의 잣대로 냉철하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이래 ‘과학적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으로써 생명의 비밀이 많이 밝혀졌으며, 이러한 지식을 실제 임상에 활용함으로써 인류의 건강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20세기 후반 이래 첨단의학의 비약적 발전은, 인간 건강의 소극적 관리자에서 인간 생명의 적극적인 창조자로 의학의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학은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전자재조합과 생명복제 등의 기술을 이용하여 아예 질병의 위협에서 해방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꿈까지 꾸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의학이 창조주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됨에 따라 앞으로 그 힘의 관리와 배분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아울러 현대의학이 주변화해 온 ‘전인성(全人性)’에 대한 요구도 더욱 커질 것으로 생각한다. 현대의학은 인체를 분절화.객관화하고 환자 대신 주로 질병을 추구함으로써 많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 대가로 환자, 즉 인간은 의학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많은 사람이 불만을 갖듯이 환자를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는 질병의 창고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의학에 대한 인간의 저항은 예고된 것일 수도 있다. 과학적 현대의학은 그 과학을 통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막상 인간들은 현대의학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화하지 못했으며, 아마 21세기에도 그러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전염병의 극복으로 질병의 패턴이 만성병 위주로 바뀌면서 환자의 적극적인 역할이 더 필요하게 되었는데도, 의학은 아직 거기에 걸맞게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최근의 첨단의학 발전에서 보듯이 종래의 모습이 더욱 강화되는 측면마저 보이고 있다. 의학에서 환자 역할이 복권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통의학으로의 복귀나 최근 거론되는 이른바 ‘대체의학(보완의술)’과 곧바로 통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새 시대에 의학이 ‘전인성’의 요구를 그 ‘과학성’ 내에 수용하지 못한다면 머지 않아 현대의학은 존재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대학은 시대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의학을 창조(연구), 보급(교육)함으로써 시대를 열어가는 대학 본연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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