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 본지 전문위원,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거꾸로 읽는 세계사』란 책이 있다. 지금은 국회에 입성한 유시민 의원이 1988년 여름에 발간해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잔잔한 화제를 몰고 온 책이다. 책머리에 왜 세계사를 거꾸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맹목적 반공주의와 흑백논리에 입각한 학교 교과서와 언론을 통해서는 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교과서는 차치하고 언론이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한 사례는 당시까지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제5공화국 시절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거의 매일 뉴스 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해 각 언론사에 은밀히 시달한 ‘보도지침’이 웅변하듯 정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광주 민주화운동은 한참동안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로 폄하되었고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에 국민들은 쌈짓돈을 모아야 했다. 당시 거꾸로 읽어야 할 것은 세계사이기에 앞서 언론이었다. 언론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사라진 오늘날 국민들은 언론을 거꾸로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난 걸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요 며칠새 벌어진 일들만 훑어보아도 이는 쉽게 확인된다. 사례 하나. 국제언론인협회(IPI)는 지난 15일 연례총회에서 노무현 정부의 언론탄압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국가로 유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 국가적 이미지와 직결된 결의문 채택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언론 상황에 관한 어떠한 여론 수렴 절차도 없었으며 총회에 참석한 우리측 위원이 결의문 채택에 항의해 총회 석상에서 퇴장했다는 사실도 거두절미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수석부회장인 IPI가 유신시절 한국의 언론 자유를 미국, 스위스와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재작년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독립적인 언론을 억압하려는 시도’라고 단정할 정도로 편향적인 단체임을 아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사례 둘.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은 정순균 국정홍보처 차장이 지난 달 22일자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기자들을 향응과 촌지나 받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했다며 총공세를 펼쳤다. 우리나라 언론계에 선물, 향응접대, 금전, 무료여행 등 갖가지 촌지수수 관행이 여전함을 지적한 한국언론재단의 언론인 의식조사 결과가 불과 두달전에 발표되었으나 이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의 국제홍보전문가협회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언론인의 촌지 청렴도가 세계 66개국 중 31위권이라는 뉴스도 무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도 굿모닝시티 사기분양이나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등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인이 연루되지 않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사례 셋. 동아일보가 지난 19일자 1면 머릿기사로 대통령 부인의 아파트 분양권 전매 의혹을 보도하자 청와대 홍보수석은 앞으로 이 신문사의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언론 대부분이 이에 알권리 침해와 헌정 유린이라며 반발하고 나섰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이번 기사가 사실은 세계일보가 지난 5월28일 사회면으로 보도한 기사와 제목이 똑같으며 내용도 구체적인 사실관계에서 대동소이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부의 언론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절에 언론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매개하지 못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치자. 언론자유가 만개했음에도 언론 보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언론을 거꾸로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보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5?16 쿠데타 직후 언론 자유의 남발을 개탄하며 무책임한 언론의 자숙을 요청한 박정희의 언론 혐오가 선견지명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