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식 / 본지 논설위원, 언론인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파동이 파동답지 않게 끝나버렸다. 그래도 이 사회에서 보수의 영역이 한 곳쯤은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든 결과인지 그건 알 수가 없다. 설사 그렇더라도 나는 그 사실규명에 별 흥미가 없다. 이번 사법파동의 본질은 정치 혹은 사회세력들이 말하는 이른바 ‘보/혁대립’이 그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태의 본질은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는 틀을 마련하느냐 마느냐는 초보적인 문제가 그 본질이다. 겉보기로는 법은 살아있고 사법부는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법부라는 세계 속에 들어가 보면 우리는 ‘정치적인 냄새’를 맡게 된다. 순수한 법의 수호자로서 판사의 위치를 지키는 틀, 그것이 바로 사법개혁이다. 진보적인 젊은 판사들이 서열을 무너뜨리며 등장하는 것이 진정한 사법개혁은 아닌 것이다. 나는 6년전 한 전직 판사의 정직한 법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방희선 변호사의 《가지 않으면 길이 없다》라는 자전적 에세이다. 방 판사는 판사 재임명에서 탈락하여 법복을 벗은 사람이다. 판사를 하다가 변호사도 하는 것이지만 그의 경우는 임명 탈락에 배경이 있다. 목포지원의 판사였던 그는 시위사건에서 돌을 던진 한 대학 졸업생의 구속 적부심을 다룬 적이 있다. 사안을 검토해 보니 구속 사유가 안되었다. 그 학생은 입영통지서를 받고 있었고 주모자도 적극 가담자도 아니었다. 현지 경찰의 현장 체증사진에 우연히 피사체가 되어 입건이 된 것이었다. 경찰은 일단 시국사범으로 구속하여 주모자를 색출하는데 그를 이용하여 구속부터 할 참이었다. 방 판사는 수사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는 단순히 데모에 참여했을 뿐이므로 구속 사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영장을 기각했다. 그런데 경찰은 그 학생을 계속 구속하고 있었다. 법은 무시되고 불법이 저질러진 것이다. 방판사의 불행은 경찰과 검찰과 법원장 사이에서 조용히 ‘정치적 타결’을 보는 관행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은 데 있었다. 사실규명 과정에서 조사회피와 회유가 일어나자 그는 정식으로 이 불법사건을 고발했다. 그리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기습적인 인사발령이었고 결국에는 판사 재임명 탈락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오해를 풀고 나가야 할 점이 있다. 그가 법복을 벗게 된 본질이 진보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10여년 법조 생활을 하면서 그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의 작은 몸부림 속에는 엄청난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민주사회의 법과 법관은 어떠해야하느냐는 그림이다. 그는 ‘정치적’ 생산양식에 오염된 사법부를 향해 작은 반항을 한 것이지 진보적 판례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법파동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법원은 본래의 모습인 재판 전문가의 직무 단체라기보다는 국가기관의 한 부분인 거대한 관료조직으로 하나의 권력집단처럼 굳어져 그 내부의 개개인을 일개의 부품 정도로 전락시키는 나쁜 전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방 판사가 6년전 자신의 두 아이들 앞에서 쓴 글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메시지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지만 그냥 매몰되어버린 것 같다. 지금 다시 ‘재현되고 있는 판’을 보면 그런 느낌이다. 대학은 젊은 교수도 늙은 교수도 교수다. 보직은 있지만 총장교수 원장교수 부장교수 과장교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론 형식이 그렇다는 것이지 엉터리 교수를 분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교수의 직함 자체에 이미 권위가 부여되며 학문적 탐구에 있어 기회와 평등이 보장된다. 이 세계에도 인맥과 전맥으로 움직이는 숨겨진 틀이 있겠지만, 마찬가지 해법이 있을 수 있다. 판사의 직급을 없애버리는 방법이다. 판사는 모두 ‘판사’로 불려진다면 법관의 독립은 한 걸음 빨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원 조직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의 핵심은 조직 내부의 정치 성향과 관료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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