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뱀을 잡아서 파는 사람을 땅꾼이라 했다. 그 땅꾼은 과거의 형벌 중 하나인 ‘경을 치다’와 관련이 있는 말이다. 과거에는 죄를 지으면 이마를 바늘로 찌르고 먹물을 넣어 영원히 변하지 않게 하는 ‘경을 치는 형벌’인 자자형(刺字刑) 즉 문신(文身)을 하여 내보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포교들이 자주 드나들며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얼굴에 흉이 있기 때문에 전과자라는 것이 표가 나서 문 밖에 함부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예의 도덕을 숭상하던 때였던지라 친족끼리의 왕래는 물론 조상의 제사까지도 참여하지 못하게 했고, 혹시 용무가 있어 이마가 아픈 것처럼 고약으로 그 흉터를 가리고 나서 갓을 쓰고 밖에 나가도 형을 받은 흉터가 바로 그 자리인지라 남들이 거의 다 알아보고 피하는 것이 예사였으며 심한 사람은 고약을 떼고 확인한 다음 갓을 찢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이들은 밖에 함부로 나갈 수도 없고 동네에서도 왕래조차 함부로 못하여 애경상문(哀慶相問)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음은 물론 심지어 그 자식들까지 대물림으로 핍박을 받았다. 이렇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는 살 수 없는 형편이라, 전과자 몇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람이 드문 곳 주로 냇가의 모래가 쌓인 곳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이들이 모래가 쌓인 냇가 땅속에다 움집을 짓고 사는 무리라 하여 ‘땅꾼’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땅꾼들은 상점을 내어 장사를 하여도 사람들은 땅꾼의 가게라서 사지 않고, 떠돌이 행상을 하여도 땅꾼의 물건이라 하여 팔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얻어먹는 거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본래 거지는 ‘개자(子)’가 변하여 ‘거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기서 ‘개(?)’는 거지라는 뜻이요, ‘자(子)’ 는 인칭 접미사이니 ‘개자’가 변하여 거지가 되었다는 설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과거에 서울에는 청계천 부근에 모래가 많이 쌓여 있어 조산(造山)이라 불렀는데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땅꾼들의 소굴이 됐다. 이 땅꾼들은 성품이 순량(順良)하지 못해 날마다 이 곳에서 저희들끼리 말다툼과 주먹질이 오고 가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조선조 성종(成宗) 때 어느 대신이 이렇게 불량한 무리가 많으면 혹시 폭동이라도 일어나 도시의 혼란을 가져올까 염려하며 임금께 아뢰었다. “조산(造山)일대에는 거지 수백 명이 모여 사옵니다. 그것들은 법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소란을 부린다 하오니 좌우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단속하게 하심이 좋을 줄 아뢰오.” 이렇게 하여 성종은 포청으로 하여금 단속케 하며 두목을 뽑아 통솔토록 하고 날마다 감독을 하니 비로소 그 곳이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당초에 포청에서 두목을 선출하게 하였지만 그 선출 방법을 그들에게 일임, 두목의 선출을 스스로 엄하고 공정하게 시행토록 하였다. 그 거지들의 조직체계와 규율은 군인들의 그것처럼 매우 엄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두목으로 당선되면 그 두목에게는 부하들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도록 하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두목을 포청에서 ‘꼭지딴’이라고 하였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감히 ‘꼭지’라고 부르지 못하였다. 또한 이 ‘꼭지딴’은 부하들이 얻어온 음식을 앉아서 먹었으며 직접 구걸행각은 결코 벌이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밥을 얻어먹는 일 이외에 잔치 집이나 초상집 문을 지켜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그릇이나 음식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잔치 집이나 초상집에서 일이 끝나면 주인은 그들에게 의복이나 돈을 주게 되는데 이런 풍속은 현재에까지도 깡패나 거지들 사회에 전해져 오고 있다. 한편 궁중 내의원(內醫院)이나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에서는 약품으로 쓰는 뱀이나 두더지, 지네, 두꺼비, 땅강아지, 고슴도치 등을 포청에다 불시에 잡아 올리라고 하면 포청에서는 땅꾼들에게 영을 내렸다. 이러한 일을 미리 예측하고 있던 거지들은 그것들을 미리 잡아 기르다가 올리라는 명령만 내려지면 그것을 올렸으므로 이 때부터 뱀을 잡는 사람을 땅꾼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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