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제 (본지 전문위원/전 한동대 교수)

설중매(雪中梅)라고 했던가. 매난국죽(梅蘭菊竹)이라 하여 옛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선비의 지표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사군자(四君子) 중에서 첫 번째 봄의 매화, 그 매화가 차가운 겨울 지나 우수날 봄비 맞고 오늘 아침 드디어 꽃을 피웠다. 나는 오늘 아침 매화꽃 앞에 섰다. 아들아, 그리고 사랑하는 딸 아린, 아라야, 보경사 앞뜰에 매화꽃이 피었단다. 나의 첫딸 아린이, 새싹 아(芽) 그리고 비늘 린(鱗) 합치면 조아린, 이른 봄까지 새싹을 감싸고 있는 새싹껍질, 그것이 아린(芽鱗)이다. 그 껍질 속에서 이른 봄에 돋아날 나무들의 새싹들이 차갑고 매서운 겨울을 지내고 있다. 그러한 심오한 뜻을 알고 나는 나의 첫 딸 이름을 바로 아린(芽鱗)이라 지었다. 오늘 아침, 매화는 한겨울 자신을 보호해주던 아린을 박차고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꽃망울을 떠트린 것이다. 아버지는 신학기 개강전 꼭 마무리 해야 할 논문, 마지막 정리를 위해 며칠전 청하 보경사에 들어왔다. 보경사 바로 옆, 하얗게 칠해진 집에 책, 논문 쌓아놓고 하루종일 글을 쓰고 있다. 새벽 네시, 보경사 범종소리, 내연산 계곡을 울리고 잠들어 있는 천지만물을 깨운다. 그리고 인간들을, 중생들을, 쇠북소리는 은은하게 일깨우고 있다. 연산군이 다녀갔다는 연산온천에 몸을 담그고 하루를 생각한다. 지난 삶을 반추한다. 절집 앞 산채식당에 들깨국에다 쌀밥 맛있게 아침먹고 하얀집에 돌아와 내연산 계곡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책읽고 글쓰고. 저녁 여섯시, 보경사 종소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일깨움이 있다. 저녁은 시락국에, 호박지짐, 칼국수 그리고 하얀 액체에 밥알이 동동뜨는 동동주 한사발에 하루를 정리한다. 현대인은, 특히 공부하는 사람은 바삐 살다가도 가끔은 만사 제치고 산속에 들어와 자신을 돌아보며 여유를 가져야 한다. 언젠가는 아린이도, 아라도, 승래도 한번 이곳에 데려오마. 아린이, 너는 네 살때부터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고 그것이 너의 전공이 되어 음대에서 4년동안 열심히 피아노 치다가 지난 주에 졸업을 하였지. 그리고 어릴 때부터 너를 이끌어 주시던 은사님과 함께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아린이, 언젠가 아버지가 아린이에게 물었지. “아린아, 피아노가 힘들지 않아?” “힘들지만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 저는 행복해요” 그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기쁘게 하고 그것이 평생할 수 있는 직업이 되면 더욱 좋다. 이 봄에 사회에 새출발하는 나의 딸 아린이, 너는 네가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미래의 꿈과 희망과 적성을 찾아내고 키워주는 선생님이다. 고사리 손을 가진 고운 아이들이 아름다운 심성을 키울 수 있도록 열심히 가르치고 다독거려 주어라. 아버지는 가난때문에 지난날 대학합격증을 찢어 버리고 경주 서남산 천룡사에 들어가 중?고등교사자격시험 봐서 스무살에 중?고등선생님이 되었다. 이후 교사를 하면서 야간대학, 대학원 거쳐 열심히 공부한 결과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구나. 그리고 고향땅에 아버지 손으로 한동대학교를 만들었고 그 곳에 교수가 되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아린아, 새봄이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봄이 아니라 나이가 만 50인 아버지의 이 봄은 생각할 것이 많고 유별나다. 다음주 개강, 또다시 새로운 젊은이들을 만나 한학기가 시작된다. 천하에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기름이 군자의 즐거움이라고 했던가! 열심히 가르치마. 그들은 이제 그저 그런 대학생들이 아니고 나의 딸 아린이, 둘째 딸 아라(芽羅)(대학2학년)와 같은 소중한 나의 아들, 딸이 아닌가. 이제는 남의 자식이 모두 내 자식 같이 예쁘고 소중하단다. 이 봄에 수백명의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나는 신나게 가르치고 꿈을 심어주며, 멋을 알게 하고, 인생을 깨우쳐 주는 일,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청하보경사, 매화꽃과 그 아린(芽鱗)을 보며 아버지의 봄 편지를 맺을란다. 2월 마지막주 목요일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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