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 하는 행위를 일컬어 ‘시치미 뗀다’고 한다. 여기서 ‘시치미’란 ‘매의 꽁지에 달아두는 주인의 표시’를 말한다. 강원도 평창 지방에서는 ‘단장구’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시치미는 그 주인의 이름과 주소가 새겨진 얇게 깎은 소의 뿔로 만들어 매의 꽁무니에 달아두는 일종의 명패(名牌)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주인이 매를 잃었을 때는 발견자가 이 시치미를 보고 주인을 찾아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발견자가 매를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겨 시치미를 떼면 그 매는 누구의 것인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견자의 소유물로 되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 행위를 ‘시치미 뗀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매에다 시치미를 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의 사냥이 시작된 것은 흔히들 백제시대였다고 한다. 이 매의 사냥은 고려조에 이르러서 더욱 성하여 충렬왕 때인 1275년에는 궁중 안에 응방(鷹坊)이란 기구를 두었으며, 그 뒤 응방도감(鷹坊都監)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를 둘 정도로 국가에서 적극 장려했다. 당시에 왕은 물론 웬만한 벼슬아치나 한량(閑良)이라면 거의가 매사냥을 즐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조 초기까지도 이어져 태종은 자신이 아끼는 매 두 마리를 항상 옆에 놓고 길렀다. 어느 날 자신의 사촌이자 개국공신인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장군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코자 아뢰니 태종은 특별히 기름진 땅과 노비를 하사코자 하였으나 양도공은 이를 굳이 사양하고 다만 어구상의 두 마리의 매를 원했다. 왕은 즉시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이응도(二鷹圖)를 그리게 하고 친히 어필로 화제(畵題)를 써 하사하였는데 지금도 그 그림이 그의 종가인 전남 영광 땅에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 매의 사냥이 왕을 비롯한 고관대작(高官大爵)들 사이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에 매사냥이 크게 성하자 사냥을 하기 위하여 길들인 매를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매가 마치도 요즈음의 사냥개 이상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이에 따라 매를 도둑맞거나 서로 뒤바뀌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매의 주인을 밝히기 위한 특별한 표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표지로 매의 꼬리 위 털 속에다 시치미를 달게 된 것이다. 이 시치미는 차츰 표지와 치장의 두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잃어버렸던 매를 찾았을 때는 그동안 매를 돌보아 준 사람에게 적당한 사례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 대신 그의 마을에 매를 데리고 가서 2~3일간 사냥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치미를 떼는 사람이 생기면서 뒤에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 하는 사람에게 “정말 그렇게 딱 잡아 뗄 거야?”하고 다그치는 말까지 생겨났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정말 그렇게 시치미를 딱 잡아 뗄 거야?”에서 온 말인 것은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